The present study is an investigation of young Korean Protestants’ views of other faiths and how they understand mission and evangelism based on those views. The empirical research shows that a considerable number of young Korean Christians have now embraced pluralistic viewpoint concerning other religions, along with the postmodern relativistic perspective about truth claims. This research concludes that both perspectives weaken the motive of traditional Christian evangelism and mission toward people of other faiths. The empirical research also indicates the urgency to recognize pluralistic and relativistic tendencies among young Korean Protestants in the history of the Korean Protestant Church. In other words, the emerging pluralistic and postmodern viewpoint, which is gaining popularity among young Koreans, is beginning to compete with the dominant traditional Korean Protestant exclusivistic theology of religions. Thus, we are beginning to see the competition between exclusivism and pluralism or relativism (religious and postmodern). An important missional issue regarding exclusivism and pluralism is that both can easily fail to engage people of other faiths. While the exclusivists close their mind and try not to listen to people of other faiths, the pluralists think it unnecessary to share the Christian faith. As a result they both have that the tendency to avoid engaging with the ‘other,’ that is, people of other faiths. In response, the researcher suggests “dialogical evangelism,” with the intention to escape the missional dangers post by both exclusivism and pluralism, and to encourage Christians to engage the ‘others’ in dialogue and love for evangelism. Having taken other faiths into consideration since the 1910 Edinburgh Conference of the World Missionary Conference, many mission thinkers have become involved in how to do missions toward people of other faiths. The dialogical approach to people of other faiths has proved to be a desirable way of doing missions. On the other hand, evangelicals have argued that its ultimate goal should be evangelism. Therefore, integrating the strengths of these two approaches, for the Korean Protestant Church and the new generation of Christians, the researcher suggests dialogical evangelism as the most viable approach to people of other faiths.
“교수와 훈도는 교양을 일삼지 아니하고 집에 물러가 있고, 관찰사와 수령은 이를 검찰하지 않는다.” 15세기 당시 향교 교육의 일단을 보여주는 이 구절은 가르치는 자, 즉 교관의 자질과 이들에 대한 엄정한 고과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본 연구는 향교 교관에게 요구된 자질과 그 고과의 기준을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교원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우선 교관은 깊이 있고[精熟] 폭넓은 학문[博學]을 섭렵하고, 나아가 학문의 방향을 알고[知方] 그 방향으로 배우는자를 이끌어야 한다. 아울러 매사에 마음을 다하여[專心]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하며[勤慤],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행실을 삼가야 한다[自重心]. 다음으로 이러한 자질을 구비하고 그 역할을 잘 수행 하는지 교관에 대한 고과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매월말 교훈한 경서, 생도의 수학 정도 등을 중심으로 학문의 우열(優劣), 그리고 실제로 출근한 것과 신병과 휴가 등 사고로 결근한 것 등을 중심으로 교회의 근만(勤慢) 등을 고과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당시 교관들 중에 학술은 가르치기에 부족했고 기개는 좌절되고 퇴폐된 자질 부족의 교관들이 적잖았고, 이들에 대한 관찰사의 고과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끝으로, 자질 항목과 고과 기준에서 드러나듯, 교관의 자질과 고과는 ‘덕’(德)과 ‘재’(才) 두루 아울러야 하지만, 특히 교직의 도덕적 감화와 실천의 중요성에 비추어 그 도덕적 자질 구비는 절실하며, 이는 고과에 있어서 ‘현부’(賢否)에 대한 고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본 연구는 조선초 향교교관 정책의 난맥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조선 건국초에 주자학으로 무장된 신흥 사대부들은 이상적 유교사회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중국의 삼대(三代)처럼 학교를 완비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향교를 급속하게 확대 설립해 나갔다. 그러나 향교교관으로 임명할 인적 자원의 확보나 교관에게 지급할 재정의 확보 등의 대책은 너무나 부실했으며, 여기에다 교관을 경시하는 풍조와 외관직을 기피하는 경향 등 향교교관 정책을 펼치는 데 당시의 조건들은 녹록지가 않았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당시 향교교 관직은 교직, 외관직, 무급직이라는 약점 외에도 천전(遷轉)이나 승직(陞職)이 힘들었던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을 지닌 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기피직이었던 향교교관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흠결이 있는 문신(文臣)을 교수로 파견하거나, 피역(避役)이 목적이었던 유학(幼學)들로 하여금 훈도(訓導)·교도(敎導)·학장을 삼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이들은 대체로 교육에 대한 의욕이나 능력이 부족하여 실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교관들에 대해 신뢰를 하지 못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향교를 기피하려 하였다. 이처럼 조선초에 향교의 증설은 시대적 당 위로서 어쩔 수 없었으나, 이것은 교관 확보가 가능한지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채 이루어진 무모한 정책이었다. 결국 이로 인하여 조선초부터 향교교육이 지속적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다가 조선 중기에 이르러 거의 폐절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의 성패는 교사에게 달려 있다고 하여 가르치는 자의 역할을 중시했다. 조선시대 중등 관학인 사학에는 교관, 학관, 사유, 학교수 등으로 불리는 교육을 담당하는 자들이 있었다. 교관제는 겸임제와 전임제가 번갈아 시행되었는데, 계속된 교관 증원 요청에서 볼 때 충분한 교관 확보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교관직은 승진과 출세가 어려운 한직으로 보아 이를 기피했고, 이는 교관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들이 교관직에 나아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교관의 자질로는 경명, 행수, 그리고 노성 등이 중시되었는데, 인지적 측면에 관한 ‘경명’과 정의적 활동적 측면에 관한 ‘행수’ 외에 대체로 ‘노성’ 즉 나이가 많은 사람을 선호했는데, 이는 다른 자리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에 가르치는 데 마음을 다하지 않는 젊은 선비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교관에 대한 평가는 교관 자신의 근만 뿐 아니라 유생에 대한 평가도 병행되었는데, 거재하는 생원은 몇 명이고 유학은 몇 명인지 유생수와 유생의 학업성취도를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때로는 무시로 평가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평가 결과에 따라 포폄을 가하거나 바로 발탁하여 등용하기도 하였으며, 때로 유생들의 유임 요청이 있을 때는 이를 받아들여 유임키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근무 여부를 충분히 파악하기 어려워 다른 방법을 강구토록 하는 등 교관 평가에도 한계가 있었던 듯하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경명과 행수를 갖춘 교관이 교육자로서의 긍지와 사명감을 갖고 교육에 임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책적 제도적 뒷받침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당시 사학의 겸임교관제, 부실한 교관 공궤, 교관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교육 부진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