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자생적인 내부적 動因이 없고, 일본의 강제적 점탈적 역사적 추이에 의해 자본주의로 진입했다고 보는 것은 (미시적 근시안적으로 접근하면)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되기에 이르렀고, 개항에 의해 우리나라가 근대화의 길을 걸었던 것은 현상적으로 나타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사적인 흐름의 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서양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맨 처음 도입한 이래 세계 각국은 先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전반적인 추세가 점차 자본주의에로 진행해 가고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재빨리 대응하였던 것에 비해, 우리나라는 늦게 대응한 결과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 본인의 견해이다. 본 논문에서는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내생적인 動因으로서, 서양에서의 봉건사회 붕괴과정에 나타난 사회 사상적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 이러한 사회 사상적 변화가 자본주의 발달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본 뒤에, 이에 관련하여 조선시대의 사회사상은 어떤 것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이러한 사회사상이 어떤 경로를 통해 타파되어 가고 있는지 알아보고 자 한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사회사상이 타파되어가는 가운데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을 배태하고 있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세계사적인 큰 맥락에서 일본이 어떻게 여기에 대응하였는지 살펴보고 조선이 취했던 당시 상황을 정밀 분석함으로서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재정리하고,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자본주의 맹아문제를 부분적이고 지엽적인 일본과의 관계에서 탈피하여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세계사적인 큰 맥락에서 우리나라의 자본주의 맹아문제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Yun Chi-ho(1865-1945) was the first Korean to study theology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fter returning to Korea, he contributed largely to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Christian higher education. This paper examines Yun’s thought on mission and education, claiming that Yun was a pioneering theologian of mission in paving a way to renewing the Christian education for life. He criticized the racially-distorted theological position of Western missionaries and changed the direction of mission from evangelism for conversion to transformation in individual life and social structure. As his diary shows, Yun’s early experience of the USA allowed him to recognize the racial prejudice of American missionaries toward indigenous people in mission fields. He argued that non-Christians should be treated as the same spiritual and intellectual beings as the missionaries. For him, Christian mission was a necessary step for widening the freedom of religion among non-Christians because it gave them more options to cultivate themselves both intellectually and morally. He believed that it was not human agents but God that was the ultimate subject of mission. His participation at the World’s Parliament of Religions strengthened his confidence in Christian mission. At the World Missionary Conference in 1910, Yun presented his ideas of mission to Western missionaries and theologians. According to him, Korean Christianity was Bible and common people centered. Pointing out three dangers(① the revival of Buddhism and Confucianism, ② the introduction of Western philosophy, and ③ the emphasis on sudden conversion), he put the principle of Christ over the first principle in the matter of financial planning and distribution decision. He believed that the self-determination of indigenous leaders through the cooperation with missionaries was more important than the needs of missionaries and their home churches. For Yun, Christian mission was deeply related to Christian education for life. He contended that Christian life was the life of faith and community open to culture and the world. In conclusion, Yun proposed a viable form of Korean Christianity which seemed to be more sympathetic to the hearts of Korean people and their culture in the early 20th century Korean context. His contemporaries, however, failed to recognize the importance of vision and strategy developed by Koreans themselves.
강명석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2차례 해외 유학이었다. 첫번째 전환점은 1920년대 중반 그는 일본 칸사이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자유로운 신학 분위기 속에서 그는 기독교 사회사상을 접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그는 비참한 민족 현실을 이해하였고, 한센병자들의 고통을 체험하며 목회의 길을 준비하였다.
일본 유학이후, 강명석은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대응하는 한편,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있는 교회와 교인들을 비판하였다. 그는 교회가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사회 현실의 이해와 사회사상의 수용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사회사상의 역사적 변천과 성경 속에서 담긴 의미 등을 검토하여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두 번째 전환점은 1930년대 초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의 유학이었다. 미국 유학과정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사상을 접하였다. 환원사 상은 교회의 일치를 표방하며, ‘성서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는 핵심 내용이었다. 그는 환원사상을 한국교회의 내분과 갈등, 충돌을 넘어서 이 땅 위에 참된 교회를 세우는 개혁사상으로 이해하였다. 이를 통한 교회의 일치는 한국교회의 개혁 방향이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강명석은 졸업직후 감리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그는 귀국 이후 <그리스도의 교회>를 본격 소개하며 환원운동의 선구자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한국 땅에 세우기 위해 열정적인 활동을 하였다. 비록 환원사상이 보수적 신학으로 평가받음에도 불구하고, 강명석은 한국교회의 내분과 갈등, 충돌을 넘어서 교회의 일치를 지향하며 이 땅 위에 참된 교회를 세우는 개혁사상으로 변용하여 받아들였던 것이다.
This paper is designed for examining the Christian religion and the Christian social thought of the early Rhee Syngman (1875-1920). Rhee Syngman is a leading figure on modern history in Korea. He is an activist for national independence; a fighter, a statesman, an educator, a diplomat, etc. In particular, as the first President (1948-1960) in the Republic of Korea (ROK), he made great contributions to the founding as well as to the developing of ROK. To our surprise, such activities were on the basis of the Christian religion of Rhee Syngman. Having converted to Christianity in a jail, he lived in a Christian for about seventy years. After his conversion, Rhee Syngman was sure that Christianity is the only way for a national salvation. This standpoint appears to his Christian social thought; a national salvation idea by Christianity, a western civilization theory, the conception of the people’s rights and the equality, a practical theology thought of participating realistic affairs. These thought were mostly formed about the same time of his prison life and had an influence on his life and multifarious activities after that time. Being considered his position as the pivotal leader and Governor of a nation, therefore, it is certain that his Christian ideas filtered into the various fields of social in Korea. For that reason, this paper is focused to above the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