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로 대표되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은 중국 전통 정치문화에서 가장 진보적이며 영원한 주제이다. 맹자는 공자와 선진 유가의 전통을 계승하여 ‘민본사상(民本思想)’ 을 사회현실에 비추어 체계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맹자는 “성선론”의 철학을 토대로 “백성은 귀하고 임금은 가볍다.”, “민중의 생산 창제”, “부역과 세금 감경”, “능력 있는 자의 등용” 등 민본이념에 근거한 “백성을 위한 정치”를 주장했다. “민본사상”은 비록 역사와 시대적 환경의 제약으로 통치계급에 이용되기도 했으나 당시의 폭정과 사회적 모순을 완화하고 폭정에 저항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맹자의 민본사상은 사회적 모순과 억압, 전제적 폭정을 억제하고 민중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고대 인문주의의 남상이 되었고, 맹자 사상이 가지는 철학과 가치는 현 대국가의 국민화합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발전을 위한 정책 등 다방면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맹자가 아내의 무례함을 싫어하여 내쫒았다(孟子出妻)’는 이야기는 긴 역사를 통해 호사가 들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列女傳』, 『韓詩外傳』, 『荀子』 등 여러 문헌들 속에서는 이 고증하기 어려운 에피소드를 자신들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전고로서 소비해왔다. 궈모뤄(郭沫若)는 역사소설 속에서 다시 이 이야기를 수양에 방해가 되는 아내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한 맹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그 인간적인 고뇌를 알아챈 아내가 스스로 집을 나간 것으로 재구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맹자의 고뇌, 남편에 대한 아내의 존경과 간절함, 그리고 성현이 되고자 하는 남편의 정진을 위해 선택한 희생 등 복합적인 심리들을 담아내면서 기존의 인식들을 비틀어놓았다. 亞聖으로서의 정형화된 형상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가려졌을 법한 맹자의 인간적인 모습은 궈모뤄의 서사를 통해 새롭게 다가온다. 본 논문에서 살펴본 맹자에 대한 이야기는 팩션 장르를 통해 이루어지는 고전에 대한 파격적 이해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며, 역사적 사실과 그 해석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얼마나 다양하고 유연한 이야기를 생산할 수 있는지를 시사해준다.
訓詁와 義理는 경전해석의 중요한 두 국면이다. 훈고는 경전의 구절에 대한 의 미 추구에 앞서 경전에 등장하는 글자와 구절에 대하여 정확한 字義와 語義를 분 석하는 학문이다. 즉 훈고는 그 경전의 정확한 의리를 파악하기 위한 전단계의 과 정으로서 경전해석의 기초적인 토대가 되면서 올바른 의리추구의 선결조건이 되 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는 정확한 字義해석에 기초한 훈 고를 바탕으로 경전에 담겨진 의리를 탐구하는 것이 경학 연구의 본령이라는 점 에 동의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성리학적 관점, 즉 훈고의 관점보다는 의리의 관 점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경향을 강하게 표출하였던 조선 성리학자들의 전 경학저작에도 대입시켜 검토해 볼 여지가 있다. 경전의 의리의 추구는 무엇보다 정확한 經文의 자의를 정확하게 이해한 다음 추구되어야 설득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것은 조선의 경학 해석에 큰 영향을 끼쳤던 주자가 자신의 사서집주를 저술하 면서 행한 방식이기도 하다. 주자는 철저하게 고증을 통한 훈고의 바탕위에서 경 전의 자의와 구절의 뜻을 무엇보다 먼저 밝히고, 大文의 대의를 밝힌 다음 자신의 의리적 관점을 반영하는 등 경전해석에서 훈고와 의리의 조화를 추구한 바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성립기의 조선 맹자학의 대표적인 저술인 퇴계 이 황의 맹자석의와 사계 김장생의 맹자변의를 검토해 보면 다음의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퇴계의 맹자석의는 조선 초기 조선의 학자로는 드물게 경전의 본문에 나아가 정확한 자의와 구절의 해석에 주의하는 훈고학적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는 한 자 한 자의 문맥에서의 뜻에 집중하여 경전의 原義를 살리려고 하였으며, 경전의 해 석에서 빚어질 수 있는 의미의 차이를 文勢와 語勢에 기초하여 바로잡으려 하였 다. 그것은 훈고의 착실한 적용을 통한 경전의 본지파악 노력이었으며, 동시에 퇴계가 파악하고자 한 경전의 의리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했다. 한편 사계의 경서변의는 경서의 본지를 회복한다는 의욕적인 자세에서 저술 되었다. 그는 경서의 해석에서 논란이 되는 구절에 대한 국내외 일류 학자들의 견 해를 소개하고, 자의와 문맥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그 핵실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변의의 최종적인 목표가 경전 자체의 본지보다는 주자가 파악한 본지의 추구에 있었기 때문에 그 논의의 범위가 주자의 해석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를 남겼다. 사계가 추구한 맹자 해석의 방향, 즉 주자의 견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면밀한 논증의 경향은 서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율곡학통의 학술적인 흐름이 되어 후대의 송시열과 한원진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전대의 퇴계 이황이 맹자석의에서 주자의 해석을 수용하면서도 정확 한 훈고를 통해 경전의 본지를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여준 것과는 대조적인 흐름으로, 경학의 본지가 어느 학자의 견해에 대한 추수보다는 경전 자체에 대한 본지 추구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아쉬움을 남긴다. 경전 자체의 본의에 충실하려는 시도는 경문을 중심으로 경전을 이해하려고 했던 일군의 학자들을 지나 박세당이나 이익 등의 학자들에게 이르러 다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