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의 목적은 가정 이곡(1298-1351)의 이중적 정체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몽골이 수립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하에서 세계인과 고려인의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방황한 이곡의 정신적 여정을 검토하려 는 것이다. 이곡은 한산의 호장 출신이다. 그는 1320년 고려의 과거에 합격했으나, 가문이 한미하여 현달하지 못했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1333년 원(元) 의 과거시험인 제과에 응시해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 결과 고려인 합 격자로서는 처음으로 원 중앙 정부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이곡은 1348년 영구 귀국할 때까지, 15년간 원과 고려를 오가며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이곡은 몽골제국의 개방성과 보편주의를 신뢰했다. 그에 따라 국가를 초월한 평천하의 정치적 이상을 꿈꾸었다. 다른 한편 그는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원 관리로 있으면서도, 고려 정부의 불공정한 인사 정책을 비판했다. 또한 고려 정부를 대변해, 원의 공녀정책의 부당성을 역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 조정에서 고관에 오르지 못한 이곡은 평천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다. 몽골과 고려의 정치세계에 어디에도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그는 경계인에 머물렀다. ‘원유자(遠遊子)’ 또는 ‘동서남북인(東西南北人)’이란 이곡 스스로의 자칭은 경계인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머니와 황제는 그의 삶의 두 축이었다. 그는 황제의 도시 연경에 머물렀지만, 다른 한편 언제나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이곡은 몽골제국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만들어낸 세계인 이자 동시에 고려인이었다. 그의 좌절은 어떤 의미에서 몽골제국의 보편성의 한계였다. 또한 몽골제국 아래 고려가 경험한 세계화의 외연적 경계였다.
학자들의 긍정적 평가를 모티브로 어쉰의 방황에 나타난 시간여행을 다루었다. 그의 시간여행은 과거로의 여행이었다. 과거의 민족혼을 현대에 되살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는 고대 아일랜드로 회귀하는 과거로의 여행을 시도하였다. 또한 어 쉰의 시간여행은 영원한 생명을 탐색하는 탐색여행이었다. 이 시가 독립적으로의 가치 보다는 후기시의 원형으로서의 가치가 더욱 크다는 점을 밝히려고 하였다.
예이츠의 초기 시 「방황하는 엥거스의 노래」는 자연의 영혼들, 특히 숲속 요정 소녀의 혼을 불러내어 영적 교류를 나누려는 초혼제 성격을 보여주는 면에서 초자연적 샤머니즘 성격을 갖고 있다. 하지만 61세 때인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에 이어 70세 생일을 기념하여 쓴 「청금석 부조」 후기 시들은 예이츠가 공인으로서 동시에 전문 시인으로서 자연의 영혼들과 교감하고 신화의 정신을 복원해 삶의 본질을 가르치고, 이로 현실에서 사회, 문화, 종교문제를 개혁하려는 네오 샤머니즘 정신에까지 진화하고 있다. 예이츠의 네오 샤먼적 이미지는 시인으로서 음악, 춤, 주술에 가까운 예술의 혼을 통해 세상의 모순과 갈등을 건강하게 해결하려는 모습이며, 현실에서는 노년에 터득한 세월의 유쾌함을 세상에 가르치려는 모습이다.
절대를 향한 엘리엇의 희구는 1927년 그가 영국국교회교도로 개종하 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 왔다. 엘리엇이 철학자에서 시인-비평가로 ‘돌아 선 것,’ 시의 몰개성 이론을 주창한 것, 그리고 의식 대(對) 무의식을 뛰어넘는 ‘비(非)의식’ 논쟁을 펼친 것 등은 모두 이처럼 절대에 대한 갈망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 갈망은 본질적으로 낭만적이며, 이상주의적이 고, 궁극적으로는 시인 단테가 의미한 바와 같이 종교적이다. 재의 수요일 은 종교적 구원에 대해 긍정적인 암시로 인해 이전의 시와는 구분 된다. 그러나, 평자들이 주장한 바처럼 절대를 노래한 시가 아니라, 이 시의 1인칭대명사 ‘I’와 접속사가 충실하게 기록하듯이 회의주의와 종교 사이에서 여전히 고민하는 정신에 관한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