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각종의 사료와 현장을 중심으로 한 사례 분석을 통해 도선 풍수는 초기에는 중국풍수와 밀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후 도선풍수는 중국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ㆍ발전되었음을 논증하는데 있다. 문헌상으로 한반도의 풍수유래는 빠르면 534년 늦어도 602년 정도에 전래된 것으로 밝혔으며,『고려사』, 『고려사절요』, 「숭복사비문」 등을 토대로 도선 이전에 이미 중국풍수가 한반도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또한 도선이 창건 또는 중수한 사찰인 옥룡사와 도피안사를 사례로 분석한 결과 중국풍수이론과 부합하는 것은 용세가 생룡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점, 사신사가 구비되고 이상적인 모 양과 상당부분 부합한다는 점, 안산은 본신안산이라는 점, 모두 와혈에 해당 하고 좌우의 맥이 혈을 둥글게 감싸고 있다는 점, 수구가 관쇄되고 합수의 조건이 충족된다는 점 등이었다. 도선풍수는 초기에는 불교의 밀교, 중국풍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추할 수 있지만 중국풍수와는 차별적인 특징이 있다. 이는 중국풍수가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였으나, 도선에 의해 한반도의 지리적ㆍ지형적ㆍ역사적 조건 등에 따라 중국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 발전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고의 목적은 17세기말 안용복의 도일(납치) 사건으로 촉발된 「울릉도쟁계」(=죽도일 건)와 관련하여 한일 간의 쟁점을 정리하고, 「울릉도쟁계」 관련 사료의 재해석을 통해 몇 가지 쟁점의 실체를 밝히고자 하였다. 첫째, 1693년 안용복과 박어둔의 납치 정황을 검토 하고, 둘째, 안용복이 서계를 받았는가 하는 점과 셋째, 「죽도도해금지령」(1696) 전후 일본인의 울릉도 도해 정황과 마츠에번 및 돗토리번의 독도 인식을 밝히고자 한다.
한국의 연구에서 안용복 일행이 총검에 위협당해 납치된 것으로 하고 있으나, 사실은 일본인의 술잔치에 꾀임을 당해 끌려갔다. 또한 안용복이 받았다는 서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당시 돗토리번에 억류되어 있었던 안용복이 막부 장군이 사는 에도로 가지도 않았다. 당시의 일본 사료를 보면 일본인의 울릉도 도해는 1695년까지 확인되며 「죽도도해금지령」 이전 마츠에번과 돗토리번의 울릉도·독도 인식은 그들의 판도 외 즉 조선의 판도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울릉도쟁계」 관련 사료는 아직 많은 부분에서 한일 간에 상호 일방적 주장을 펼치고 있다. 앞으로 양측의 사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울릉도쟁계」의 실체를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