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조선 숙종 · 경종대에 무신으로 활약한 운암 장한상의 官歷과 주요 행적을 조사 · 검토한 것이다. 장한상은 21세 때인 1676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1678 년에 宣傳官에 임명됨으로써 비로소 관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장한상은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 과정에서 그는 능력 있는 무신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장한상도 숙종 · 경종대의 換局政治 하에서 품계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정치적 의미가 있는 고위 관직에 진출하면서는 자신의 정치적 · 사회적 지위 보전과 상승을 위해 시기마다의 집권세력과 일정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1689년 기사환국 이후에는 집권세력인 남인 측과 관계를 맺었고, 1694년 갑술환국 이후에는 정치권력을 장악한 노론 세력과 일정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집권세력이 바뀌면 후임정권 세력에 의한 비판을 벗어날 수가 없어 자주 臺諫의 탄핵을 받았다. 이때마다 숙종과 경종은 장한상을 위해 변명 내지 옹호를 해주거나 처벌 수위를 낮추어 주었다. 또 停啟를 지시하기도 하였다. 이는 숙종과 경종이 무신으로서 장한상의 자질과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사실 장한상은 당시에 조정 안팎에서 유능한 무신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이러한 장한상의 주요 행적으로는 우선 1694년에 삼척첨사로 임명되어 울릉도를 수토하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 장한상의 울릉도 수토는 조선후기에 울릉도 수토제가 제도적으로 채택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가 수토 중에 독도를 조망하 였다는 사실은 한 · 일간의 독도 영유권 논쟁에서 한국 사람들이 일찍부터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점을 입증해주는 귀중한 기록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장한상은 1682년에 일본 통신사 軍官으로 差定되어 일본에 갔다 왔고, 1711년에는 북한산성 축성에 都廳으로 참여하여 공사를 감독하였다. 또 1712년에 는 백두산 남쪽 지역을 직접 조사함으로써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선을 정하는 데에 사전 지식을 제공하였다. 이외에도 장한상은 北兵使로 있을 때 士卒 조련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고 또 무기의 성능 개량에도 관심을 가졌다. 아울러 飢民의 진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울릉도 수토에 관한 연구는 다양한 방면에서 진행되어 왔다. 우선은 조선후기 울릉도 搜討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현황의 사실 관계와 제도적 정착에 대한 연구를 비롯하여 울진 지역의 수토 관련 越松浦鎭城과 待風軒 등에 대한 연구, 그리고 수토사가 그려 온 울릉도 지도 및 대풍헌 현판 등 자료에 대한 연구나 사료에 대한 해제 등도 있으나 수토사와 관련하여 포괄적인 측면에서의 관련 유적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본 논문에서는 여러 기록을 통하여 수토사 관련한 유적지를 연구하였다.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울릉도 수토 관련 유적지는 삼척 수군 관련 유적지, 수토 수행과정에서의 대풍소나 祭儀 神堂, 수토에 참여한 인물 관련 유적지, 기타 관련 유적지가 있는데 이를 각각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삼척수군진이 설치되어 있던 삼척포진과 관련된 유적지인데, 이와 관련하 여서는 軍船을 정박시키는 포구였던 삼척포와 수군의 각종 장비와 물자를 보관하 고 첨사가 군관을 거느리고 주둔하였던 삼척포진성이 그 핵심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유적에 대한 조사에서 수군진성의 하부가 지하에 매립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둘째는 삼척에서 울릉도로 항해하는 과정과 관련된 유적이다. 삼척에서 출발하는 수토군들은 먼저 모든 장비를 갖추고 營下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적당한 바 람이 불 때 바다로 나가서 출발하였는데, 이 때 바람을 기다리는 대풍소와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여러 가지 제사를 곳이 있었다. 특히 1872년에 만들어진 지방지도의 삼척부 지도를 보면 삼척수군진성으로부터 오십천 건너편 고성산(오화리산성이 있는 곳) 근처에 붉은 선 안에“東海”라고 표시해 놓은 것이 있는데 이곳이 동해신제를 지낸 곳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 삼척의 수토 관련 유적으로는 후망소, 수토사 인물 유적, 울릉도 유적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울릉도 수토가 실시되는 동안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에서는 임시의 거처를 만들고 바다를 감시해야 했는데, 그러한 후망소가 어느 곳에 설치되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는 울릉도에서 돌아오는 선박이 표류할 경우 동해안 지역에서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곳에 설치되었을 것이며, 대풍소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척후가 있었다고 하는 삼척의 藏吾里浦(근덕면 장호리), 그리고 『陟 州志』(上)에 바닷가의 망대인 海汀候望으로 기록된 介谷, 宮村, 馬頭, 窟岩, 龍場 이 그와 관련된 곳일 가능성이 크다. 아을러 고려시대에 삼척 지역에 설치된 戍所 인 桐津戍․臨遠戍가 있던 곳도 바다를 감시하고 방어하는 중요한 요충지였으므로 이곳도 후망 장소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수토를 수행한 인물과 관련된 유적지(혹은 유물)는 삼척지역에서 현재 뚜렷하게 확인되는 곳이 없다. 삼척영장으로 울릉도 수토를 수행한 장한상은 경북 의성에 묘가 있고, 이준명은 경기도 성남시에 묘가 있으며, 구억은 충남 공주에 묘가 있다. 여타의 수토를 수행한 것으로 확인된 삼척첨사의 관련 유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육향산에 있는 삼척영장송덕비 가운데 울릉도 수토를 수행한 삼척영장 송덕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월송포 만호가 수토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월송만호의 上官은 삼척영장이었기 때문에 삼척영장송덕비 자체는 관련 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조선전기에 울릉도를 세 번씩이나 왕래하며 수토 임무를 행한 삼척사람 김인우의 유적은 앞으로 확인될 가능성이 있는 바, 향후 적극적으로 자료를 발굴하여 선양할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울릉도에 소재하는 수토 관련 암각문이나 표석, 김인우와 관련된 태하리 성하신당 등도 관련 유적지에 해당하나 본 논고에서는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았다.
울릉도 독도는 6세기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시기부터 고려, 조선을 거쳐 대한 제국기인 1905년까지 강원도 관할 하에 있었다. 강원도 지역민들은 고대 때부터 육안으로 '울릉도 독도'를 바라보며 '우산국' '무릉도 우산도'라 불러온 같은 생활 권역에 있다. 일제 침략과정에서 울릉도 독도와 지리적, 역사적, 생활문화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던 강원도를 배제하고 부산, 포항으로 해상교통 거점을 의도적으로 바꾸면서 행정의 연속성을 흔들어놓았다. 1906년 행정구역 편제로 강원도 관할에서 경상남도로 이관되었으며, 1914년엔 경상북도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울릉도 독도가 타 시도로 이관된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교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고 인식되었는지 1920~30년대 신문 기사를 통해 살펴보았다. 1920~30년대 동아일보에 실린 울릉도 관련 기사 164건을 대상으로 강원도 부분이 어떻게 서술되어 있는지 분석한 결과 행정 및 민원 관련 기사는 강원도와 무관하였으나 실생활과 역사성을 다룬 기사에서 서술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울릉도 입도 과정, 해상 조난 등 사건 사고, 태풍과 같은 기상, 경제 활동 등 실생활과 밀접한 뉴스에 나타나고 있다. 1920~30년대 경상도 부산항이나 포항항, 함경도 원산항에서 울릉도를 입출항할 때 강원도 울진 앞 바다까지 북상 내지 남하하여 동쪽으로 선회하고 있어 최단거리 항구인 울진 죽변항이나 삼척 임원항은 여전히 중요 항구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두 번째는 역사, 전설을 다룬 기사에서 강원도 관련 내용이 풍부하게 서술되고 있다. 울릉도 역사 서술의 첫머리에 하슬라군주 이사부 활약 및 고려 때 강원인의 이주 시도, 삼척영장과 월송만호 수토, 개척령 시기 강원인 이주 등 강원도 역사와 중첩돼 환기되고 있다. 울릉도 태하리 성하신당 전설은 강원도 수토사를 수행 해왔다가 풍랑으로 익사한 강원도 하급관리의 희생을 기리는 공간이었으나 이후 울릉도사람들의 무사안전을 기원하는 신앙처로 윤색되어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울릉도가 강원도 행정관할에서 타도로 이관되면서 각종교류도 위축되었으나 1920~30년대 울릉도 관련 신문기사를 통해 실생활 차원의 교류는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역사성도 언론을 통해 수시로 환기되고 기억되고 있다. 현재 강원도는 울릉도 독도와 행정구역을 달리하고 있지만 최근 인적교류가 가장 활발한 곳으로 위치를 다시 점하며 교류거점으로 재부상되는 역사성이 발휘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근거로, 외무성 홈페이지에서 한국이 옛날부터 다케시마(독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없다는 것과 1403년 조선의 울릉도 주민쇄출은 조선에서 독도를 포기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주장대로 울릉도에서 주민을 쇄출하여 울릉도를 무인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인화의 이유는 울릉도가 동해안 왜구침탈의 중간 거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무인화이후 우산무릉등처안무사 와 순심경차관을 파 견했고, 조선후기에는 수토사를 파견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관리했다. 최초의 수토사였던 장한상의 기록은 『울릉도』와 『울릉도사적』에 상세하다. 이 기록들을 통해 울릉도 수토계획 및 목적, 구체적인 수토내용, 수토당시의 독도확인과 왜에 대한 경계 등을 알 수 있다. 수토제의 시작은 안용복 피랍사건이후, 왜인의 울릉도 침탈을 막기 위해,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키고, 진을 설치할 계획을 가지고 실시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주민의 울릉도 이주가 어렵게 되자, 수토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울릉도』나 『울릉도사적』의 내용 중에 울릉도에서 대관령이 보이고, 동남쪽으로 섬이 보인다는 기록을 통해 그 섬이 독도임을 알 수 있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의 한국이 옛날부터 다케시마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없다는 기술의 허구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후기 울릉도 수토제가 조선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정기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실시했던 제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