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의 목적은 17세기 후반에 발생했던 안용복의 피랍․도일사건이 갖는 의미를 규명하기 위한 데 있다. 안용복의 피랍․도일 과정과 그것을 둘러싼 논쟁점을 살펴보고, 그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정리해보고자 하였다. 첫째, 안용복이 1693년 요나고의 오야가 소속 어부들에게 피랍되었다가 표류민 송환의 절차에 따라 귀국할 때 비변사에서 안용복이 진술한대로 서계를 수령한 것은 아니었지만, 1695년 막부의 질의에 대한 돗토리번의 답변이나 1696년 2차 도일 당시 작성된 일본측 조사기록 등을 통해서 미루어 안용복은 돗토리번의 家 老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모종의 문서를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1693년과 1696년 두 차례의 도일은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 재확인의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진행된 울릉도수토정책으로 계승되었다. 안용복의 도일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현재까지 한국이 동해의 해양주권을 유지하는 바탕이 되었으며,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정부는 적극적인 교섭 을 통해 막부의 일본인에 대한 ‘竹島渡海禁止令’을 끌어냈고, 울릉도 해역을 포함한 조선정부의 도서정책의 변화를 끌어냈다. 조선정부는 ‘울릉도쟁계’교섭 과정 중이던 1694년 9월 張漢相을 삼척첨사로 임명하여 울릉도를 조사하게 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시 중단되었던 울릉도 搜討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699년부터는 邊將의 정기적인 수토를 제도화하였다. 세째, 안용복이 쓰시마번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일본에 간 것은 대조선통교권을 독점하고 있던 쓰시마로 하여금 조선이 일본 幕府 등과 직접 통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쓰시마번의 儒者로 대조선교섭 전문가인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언급한대로, 안용복의 도일로 시작된 ‘울릉도쟁계’는 조일간의 외교교섭에 있어서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따라서 안용복의 도일로 촉발된 울릉도쟁계 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 조일관계가 비정상적인 외교적 관행이 고착되어 있던 상황을 타파하고 외교적 원칙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면서 처리된 사건으로 조일외교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안용복 피랍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겐로쿠 다케시마 일건 (元禄竹島一件)’의 결과, 에도 막부(江戶幕府)는 ‘다케시마(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 이 금지령에 마쓰시마(松島, 독도)의 이름은 없었지만 금지령을 내린 경위를 생각하면 “다케시마 근처의 마쓰시마”도 도해가 금지된 것이다. 게다가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조선영토임은 1724 (교호 享保9)년 에 돗도리번으로부터 에도막부에 제출된 「다케시마노 가키쓰케(竹島之書付) 3통」에 부속 된 그림지도 「다케시마 도(竹島圖)」에서 확인된다. 이 그림지도는 분명히 다케시마 · 마쓰 시마의 한 쌍을 조선영토로 그렸다. 그후 에도막부는 ‘덴포 다케시마 일건(天保竹島一件)’때에 사건 기록 『조선 다케시마 도항 시말기(朝鮮竹島渡航始末記)』를 작성했는데 이에 부속된 그림지도에서 다케시마 · 마쓰시마를 조선영토로 그렸다. 이는 ‘겐로쿠 다케시마 일건’의 인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 인식은 에도시대 말기까지 계속됐으며, 에도막부는 쵸슈번(長州藩)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郎) 등으로부터 제출된 마쓰시마를 포함한 다케시마 개척 청원서에 대해 다케시마는 덴포기 에 조선영토임을 확인했다는 이유로 각하했다. 이런 다케시마 · 마쓰시마를 조선영토로 보는 인식은 메이지(明治)정부에도 이어졌다. 메 이지 초년에 조선을 내탐하기 위해 부산의 왜관 등으로 파견된 일본외무성 관료들은 ‘겐로 쿠 다케시마 일건’을 충분히 조사해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했다. 한편, 일본내무성에서는 지지과가 관찬지지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겐로쿠 다케시마 일 건’을 조사해,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일본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 소다케시마 각서(礒竹島覺書)』를 편찬했다. 이 직후 지지과는 태정관으로 옮기고 관찬지지 『일본지지제요(日本地誌提要)』를 편찬했으니 이 책에도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인식이 이어졌다. 이처럼 내무성 및 태정관은 다케시마 · 마쓰시마가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인식을 가졌으니 시마네현에서 「일본해내 다케시마 외 1도 지적 편찬 질문서(日本海内竹島外一島地籍編纂方伺)」가 제출됐을 때 쉽게 다케시마 · 마쓰시마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인식에 근거해 내무성은 다케시마 · 마쓰시마를 일관해 일본영토 밖으로 하는 관찬지도를 작성했다. 특히 지도 책 ꡔ대일본국 전도(大日本国全圖)ꡕ에서는 1871년부터 1883년까 지 일본 각지의 소속의 변천을 지도 12장에 밝혔는데 이 모든 지도에 다케시마 · 마쓰시마 는 없으며 일본영토로 취급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역사상 독도를 조선 · 한국 영토로 판단한 일은 몇 번이나 있으나, 독도를 일본영토로 판단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독도를 일본은 제국주의적 수법으로 1905년 에 일본땅으로 편입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외무성의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