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ㆍ진 시기는 경제ㆍ정치뿐만이 아니라 서예(書藝)에서도 중요한 변혁기로 이전의 전서ㆍ예서ㆍ해서ㆍ장초ㆍ행서ㆍ초서 등 여러 서체를 활용하여 서예가들이 개인적으로 예술 풍격을 꽃피우는 양상을 나타냈다. 진나라 시기의 서예는 당시(唐詩)ㆍ 송사(宋詞)ㆍ원곡(元曲)이 나란히 문단에 이름을 날린 것처럼 후대에도 인정받았는데, 특히 ‘상운(尙韻)’의 서예로 대표되는 왕희지 서예는 우아하고 표일한 기운이 넘쳐 많은 이들의 사랑 을 받았다. 왕희지는 또한 광범위하게 한ㆍ위 이래 많은 서예작품에서 유익한 자양분을 얻고, 전대(前代)와 당대(當代)에 분산된 서예 작품에서의 창조적인 요소들을 집대성하여 정제과정을 거침으 로써 자신의 새로운 예술창조에 융합ㆍ통일하여 자아를 풍부하 게 하는 신서체(新書體)로의 변법(變法)에 성공함으로써 한 시 대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고질(古質)’ 서풍 대신 ‘금연(今姸)’ 서풍을 내세워 후대의 서예가들은 물론 한반도의 서예가들에게도 손길이 닿는 모범이 되었다. 본고는 왕희지의 생애ㆍ사상ㆍ학문 등을 살펴보고 서예의 눈 부신 성취와 함께 서체 변법의 성공과 그 서예가 후대 서예계 에 미치는 영향을 중점적으로 탐구하여 고질의 서풍에서 유미 한 서풍으로의 변법을 고찰하고, 서체의 변법은 중국뿐만 아니 라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그가 창출한 변법의 서예를 활용한 문인서예의 승화 와 함께 서예의 위상을 정립하고 미래의 지향할 바를 연구하고 자한다.
서예의 경우 남아있는 자료로 한국서예정체성을 규명하고자 한다면 두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주로 비학 혹은 금석문 서예에 보이는 부정형성, 무작위성을 들 수 있다. 이런 점은 한국미 특질로 말해지는 자연미와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 는데, 이런 분석이 帖學의 측면에서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 은 여전히 한계다. 다른 하나는 왕희지 추존에 담긴 유가 중화 미학 틀에서 논의되는 한국서예정체성에 대한 규명이다. 한국 서예역사에서 왕희지 추존 현상은 강하게 나타났지만, 한국최 대의 서예가로 평가받는 金生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이처럼 한 작가를 평가할 때 이해하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이 해가 가능하다. 이에 왕희지 중심주의와 중화미학의 틀에서 한 국서예정체성을 규명할 때는 한국서예가들이 중국서예가들과 어떤 차별상을 보였는가에 대한 정치한 분석을 통해 ‘古雅한 예술 측면으로서의 한국서예미의 특질과 정체성’을 밝힐 필요 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왕희지 서예와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밝힐 필요가 있다. 그 ‘다른 점’에 한국인의 심성과 미의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히 ‘偏’에 담긴 서예를 예술에서의 기교의 공졸 혹은 美의 우열이란 점을 기준으로 하 여 평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서 천진스러움과 天機를 담아낸 서체, 즉 자신의 감성을 어떤 서체를 통해 자유롭게 표현했는 가 하는 점을 심도있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제 서예에서의 문화사대주의인 왕희지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오늘날 ‘우리들의 눈’으로 과거 한국의 위대한 서예가들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통해 한국서예정체성을 논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