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자연으로의 回歸와 名利를 추구하는 현실 安住의 矛盾된 개념 이 意識속에 內在해 있다. 인간이 世慾을 버리기는 쉽지 않지만 超然히 마음을 비우고 歸去來의 삶을 실천한 사람은 전설 속의 許由, 춘추시대 吳나라의 季札, 後漢光武帝의 벗 嚴子陵, 東晉의 陶淵明, 우리나라의 元天錫(1330~?), 南道振 (1674~1735), 李夏坤(1677~1724) 같은 분들이 있다. 麗末三隱의 한 분인 吉冶隱도 高麗의 滅亡이라는 時代狀況에서 隱逸의 삶을 선택한 분이다. 冶隱의 文學이나 思想, 節義등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분의 論稿 가 나와 있고, 야은의 思想的·節義的측면을 살피면서 文學的특성을 살핀 論議 의 방향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本稿의 목적은 麗末三隱에 대한 再檢討와, 冶隱의 文學에 나타난 삶과 隱逸의 정신적 배경을 살피는 데 있다. 아울러 새로 발견된 冶隱詩稿를 소개하는 것도 이 논문의 목적 중 하나다. 論旨를 전개하면서 그때그때 先行硏究의 성과를 살피되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은 再論하지 않고, 本稿에 꼭 필요한 부분들만 살피겠다.
어떤 인물이 남긴 문학작품과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을 읽을 때, 그것이 담아내지 않은 혹은 담아내지 못한 행간 사이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가 살아간 시대의 배경 속에 놓고 파악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인물이 선택한 사회적 참여나 은일적 처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시대의 상황이 과연 어떠했는지가 분명하게 설명되어야 하며, 그런 시대 속에서 그 인물이 선택한 처세는 정당한 것이었는가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박내오가 살아간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의 은일적 삶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았으며, 그 연장선에서 지리산 유람에 나타난 그의 의식과 지향이 무엇이었는지를 짚어보고자 했다. 지리산 유람에 나타난 박내오의 의식과 지향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내적 정체성이 남명학파에 가깝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이러한 박내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18세기 강우지역의 인물 가운데 남명학파로 거론되지 않은 인물들을 새롭게 발굴하고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15-16세기에 걸쳐 계속된 몇 차례의 사화로 많은 지식인들은 은거의 길을 선택 하였다. 이들은 물러나 있지만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였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비판하였다. 그들은 ‘隱進’ · ‘處士’ · ‘逸士’ · ‘徵士’ · ‘居士’ 등의 영예로운 호칭으로 불리었으며, 국가에서는 遺逸薦擧制라는 독특한 천거 방식을 통해 그들을 예우하였다. 동주 성제원(1 506-1559) 또한 기묘사화의 참혹한 피해 상을 직접 보고 은거하였다가 후에 遺逸로 천거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退處型사림들의 보편적 학문 성향, 곧 이론적이고 성리학 일변도의 학문 추구보다는 실천적이고 현실적이며, 어디까지나 성리학에 근본을 두되 성리학 외의 불교 · 노장은 물론 천문 · 복서 · 의 학에 이르는 잡학까지 두루 섭렵하는 탄력적인 학문성향을 나타내였다. 士의 출처 에 대해서는 그 시대가 왕도를 실행할 만한가, 士자신이 그 소임을 감당할 충분 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라야만 출사가 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평생 출사하지 않다가 말년에 遺逸薦擧로 보은현감에 제수되었는데, 이를 그 동안 자신이 축적한 능력을 발휘할 계기로 삼았다. 이는 3년 간의 치세를 마치자 곧바로 은거의 삶으로 돌아간 그의 결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주를 비롯한 이 시기 遺逸之士들의 이 같은 처세는 후세 여러 학자들에 의해 칭송을 받았으며, 출처의 자세와 방향에 準據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