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영규사실기」의 내용에 의거하여 그의 생애사와 의병활동 을 확인해보고, 왜 그런 기록이 등장했는지, 불교와 유교측 간에 영규에 대한 시각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영규사실기」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는 시점에서 영규가 전란을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의병장들의 전투 기록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영규사실기」에서는 영규가 전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나무를 쪼개 무예훈련을 했다던가, 단단한 나무를 발견하면 따로 숨겨두었다는 것은 스스로 미래의 전란을 대비하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조헌과 고경명 등 호남지역의 의병장을 하게 되는 이들이 갑사로 찾아오는 장면은 이른 시기에 의병모집을 했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영규사실기」에서처럼 사실(史實)이 확인되지 않는 내용으로 영규를 미화하거나,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 등은 유교 지식인들이 쓴 영규 관련 자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불교 측이 영규를 선양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면에, 유교 측에서는 적극적으로 영규의 의병활동에 따른 계율논쟁을 변증하고, 그의 충절을 부각시켜왔다. 이는 영규의 의병부대가 전란 초기에 전과를 올림으로써 조선정부의 위기상황을 전환시키는데 기여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세기에 「영규사실기」와 같은 문헌이 등장하고, 계룡산에 사우를 세우는 등 영규에 대한 추숭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은 이러한 불교와 유교 간의 누적된 시각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유교 지식인들의 노력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결국 불교 승려로서가 아니라, 왕조를 위해 절명한 의병장으로서의 영규를 추숭하려 했던 그들의 의지가 배경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農圃 鄭文孚의 (1565-1624)는 서울에서 태어나,어려서부터 남다른 詩才를 보이며 성장하였다. 그는 7살 때 이미 「玉顔不及寒鴉色」이란 오언 고시로 시적인 재능을 드러내 보였고,8살때 지은 「初月」은 황진이의 詠半月로 와전되어 사람들 입에 널리 회자되었다. 그가 14세 되던 해에 陞補詩에 장원을 한 「月明花落又黃昏」은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科體詩로 明나라 사신에게 전해지기도 하였다. 그의 벼슬길은 1588년 甲科에 2등으로 급제하면서,이듬해 2월 承政院의 注書 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발발한 임진의 전쟁에서 그는 成慶道 北評事로써 관북 지방에 침략한 왜척들을 소탕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농포의 벼슬길은 순탄하였다. 중간에 몇 차례 집안의 喪으로 인해 참시 벼슬길에 물러나기도 하였지만, 영흥과 온성 · 장단 등의 부사와 걸주와 공주의 목사 등등을 역임하면서,사은부사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남원 부사를 지내던 중 형조참판에 제수되였으나 고사하다가,길주 목사를 끝으로 1613 년 49세의 나이로 그는 還鄕하였다. 농포는 이후 다시는 벼슬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누차에 걸친 조정의 부름에도 끝내 응하지 않고,초야에 묻혀 일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무고에 연루되어 옥사하고 말았다. 농포는 문신으로써,우리의 역사에 빛나는 군공을 세운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농포의 시는 354수가 현전한다. 이 시들은 지극히 남성적인 체취와 여성적연 정감이라는 두 개의 큰 축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농포는 먼저 상당량의 古詩를 통해 일상에서 느끼는 所懷와 史實의 褒貶을 진득하게 기하면서, 남성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냐아가 文人畵창작에 직접 임하면서 선비다운 기개와 풍모를 닦고,그림과 시로 이를 내보였던 것이다. 농포의 섬세한 정감은 여성을 주제로 한 일반적인 시들과 題畵詩에서 드러난다 자신과 동등한 객체로써, 아름다운 미의 상징우로써 여성들을 직시하였다 그리고 티 없는 동심을 지닌 순수한 존재로써 아이들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