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호남출신의 문인 頤齋 黃胤錫(1729∼1791)이 아내와 小室에 대해 남 긴 기록을 통해 그가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애정을 표현했는지 그의 한시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당시 鄕儒가 가졌던 배 우자에 대한 의식의 일면을 알아보려 한다.
본고는 그의 시 중에서 특히 아내와 소실을 대상으로 지은 작품에 주목했다. 이재는 20세에 남원에 살던 창원 정씨와 혼례를 올렸는데 24세부터 과거와 학 업을 위해 아내와 떨어져 지냈고, 38세에 음보로 장릉 참봉의 일을 하게 되면서 부터는 더욱 긴 시간 동안 집안일은 아내에게 맡긴 채 객지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가까이에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는 아쉬움과 어린 자식들이 커나가 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하는 서글픔 등과 함께 이 모든 가정사를 홀로 도 맡아 책임지고 있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그가 남긴 일기의 곳곳에 서 드러난다.
특히 아내는 일상적인 가정사 이외에도 이재가 객지에 머무는 동안 출산이나 死産·어린 자식의 夭折 등 큰 어려움들을 홀로 견뎌내야 했다. 이처럼 아내는 홀로 고생만 하다가 48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따라서 이재가 현감이 되었을 때는 정작 그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없었다. 이재는 이점을 무엇보다도 아쉬워했고 그래서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아내의 생일이나 기일이 되면 지난 날을 회상하며 그녀를 추모하곤 했다.
남자가 홀로 객지 생활을 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기에 장릉 참봉 시절부터 주위 사람들은 이재에게 첩을 들여 의식주를 돌보게 하는 것을 권유했고 이재 역시 첩을 들이는 것을 염두에 두기는 했다. 하지만 가족들과의 관계나 경제적 인 문제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喪期를 마친 뒤에야 小室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小室은 황윤석과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집에 머물며 며느리 의 빈자리를 대신해야 했으므로 이재는 여전히 홀로 객지에서 벼슬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소실을 들인 2년 뒤에 목천현감이 되어 어머니· 자식들과 함께 소실도 목천현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지만, 이 무렵 소실은 병 이 들어 현감생활 내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이재는 소실의 병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의원을 초빙하고 탕약 을 제공하며 성심껏 소실을 보살폈고 소실 역시 병중에서도 안주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목천현에서 파직되고 수년 간 고향에 머 물다가 다시 전의현감에 오르고 이듬해 최종적으로 벼슬을 떠나 고향에 머무를 때까지 소실은 이재의 곁에서 아내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주었고 이런 소실에 대해 이재는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최근 발생한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사건과 같이 남북한 전쟁에 대한 위기감이 확산됨에 따라 전쟁이 발발할 경우 국민들이 일정기간 동안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임시거주공간 확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하철 역사는 민방위기본법에 의해 폭격에 대한 방호기능을 갖춘 2등급시설로서 대규모 이재민을 수용하기 위한 임시거주공간으로 충분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민방위기본법에는 지하철을 대피시설로 활용할 경우 4인당 3.3㎡를 확보하도록 최소 기준만을 설정해 줄 뿐 전쟁 장기화시 임시거주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부사항에 대한 기준은 없다. 뿐만 아니라 소방방재청의 재해구호계획 수립지침에서도 풍수해대비나 지진에 대비한 임시거주공간에 대한 기준은 있으나 전쟁에 대응한 지하 임시거주공간에 대한 기준은 없는 상황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연평도 포격 이재민을 대상으로 연평도 포격당시 대피소의 문제점과 지하 임시대피공간에 대한 요구도 설문조사를 통해 향후 전쟁대응 지하 임시거주공간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기초연구로 활용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