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국가적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할 때 다수의 서구인들이 조선을 방문했다. 이들 중의 일부는 모국으로 돌아간 이후 자신들의 경험을 다양한 형태의 글로 재현했다. 특히 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의 경우 편지, 잡지기사, 팸플릿 안내문, 연설문, 일기, 여행기, 및 기독교 소설과 같은 ‘잡다한’ 글들을 기록했다. 미국 선교사들이 남긴 다양한 출판물 중에서 본 논문은 엘라수 캔터 와그너(Ellasue Canter Wagner)의 김수방과 조선에 관한 이야기들 (KIM Su-Bang and Other Stories of Korea)과 애니 배어드(Annie Baird)의 '동트는 조선' (Daybreak in Korea)을 산문이론으로 접근한다. 일부 학자들은 김수방과 조선에 관한 이야기들이나 '동트는 조선'과 같이 기독교로 개종한 조선인들의 삶을 기록한 서사를 ‘선교소설’로 구분한다. 기존의 주장과는 달리, 본 논문은 배어드와 와그너의 글을 ‘여행서사’로 분류한다. 배어드와 와그너의 작품에 등장하는 조선인들의 삶과 당시 두 선교사 작가들이 글을 쓸 때 처해있던 상황을 볼 때 이들의 글을 여행서사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 본 논문의 쟁점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자생적인 내부적 動因이 없고, 일본의 강제적 점탈적 역사적 추이에 의해 자본주의로 진입했다고 보는 것은 (미시적 근시안적으로 접근하면)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되기에 이르렀고, 개항에 의해 우리나라가 근대화의 길을 걸었던 것은 현상적으로 나타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사적인 흐름의 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서양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맨 처음 도입한 이래 세계 각국은 先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전반적인 추세가 점차 자본주의에로 진행해 가고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재빨리 대응하였던 것에 비해, 우리나라는 늦게 대응한 결과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 본인의 견해이다. 본 논문에서는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내생적인 動因으로서, 서양에서의 봉건사회 붕괴과정에 나타난 사회 사상적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 이러한 사회 사상적 변화가 자본주의 발달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본 뒤에, 이에 관련하여 조선시대의 사회사상은 어떤 것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이러한 사회사상이 어떤 경로를 통해 타파되어 가고 있는지 알아보고 자 한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사회사상이 타파되어가는 가운데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을 배태하고 있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세계사적인 큰 맥락에서 일본이 어떻게 여기에 대응하였는지 살펴보고 조선이 취했던 당시 상황을 정밀 분석함으로서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재정리하고,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자본주의 맹아문제를 부분적이고 지엽적인 일본과의 관계에서 탈피하여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세계사적인 큰 맥락에서 우리나라의 자본주의 맹아문제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 논문은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이 성서 번역과 지식 전달의 도구로 한글을 사용함으로써 한글을 재인식시키고 더 나아가 한글 공동체를 형성 하는 데에 끼친 공헌을 다루었다. 한글은 창제 이래 “양층 언어”라는 독특 한 언어 상황 속에서 한문의 하위 언어로서의 지위를 한번도 벗어 보지 못 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중화사상이 흔들림에 따라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 졌던 한문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그 자리를 대신하여 한글은 국문 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게 된다. 하지만 한글은 현실적으로 국문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고 국한문 혼용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것이 19세기 말 조선의 언어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들은 성 서번역과 문서 출판의 도구로 한글을 과감하게 선택함으로써 한글이 하나 님의 말씀을 전하고 지식을 전달하는 상층 언어로서 인식되는 데에 큰 공 헌을 했다. 한글이 처음으로 유교 경전의 내용을 담던 한자와 대등한 지위 를 부여 받게 된 것이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공헌은 단순히 한글을 재인식 시키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같은 문자 로 같은 정보를 공유하고 공론에 함께 참여하는 한글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볼 때 선교사들은 19세기 말 한글이 국문으 로 탄생되는 시기에 한글의 가치를 재인식 시키는 데에 매우 영향력 있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용도의 시대인식과 조선적기독교를 연구하였다. 먼저 그의 시대인식을 파악하기 위해 그가 조선교회, 선교사 및 서구교회, 그리고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고찰하였다. 또 이런 시대인식이 예수교회의 설립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조선적 기독교 운동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고찰하였다.
이용도는 조선교회의 정통주의적 주류 신앙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선교사 및 서구교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전형적인 반교회적, 반선교사적인 인물로는 평가할 수 없다. 그는 협성신학교를 입학한 후 정치적 민족주의를 포기하였다. 때문에 예수교회의 설립은 일본에 대한 민족주의적 동기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용도가 예수교회를 설립한 이유는 조선교회의 신앙적 체질을 바꾸고자 한 그의 시도가 장로교회의 견해와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적 기독교 운동의 관점에서 예수교회는 서구교회로부터의 신학적, 경제적 독립보다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발생하였다. 체험적이고 실천적인 신앙을 추구하였던 이용도 지지자들은 기성교회의 권위에 부딪히자 독자적인 교회의 설립으로 나아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