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16세기는 유교화의 진전이 상당히 발전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지난 1세기 동안 조선에서 유교의 정착을 위해 양반 관료와 사대 부 그리고 유생들이 국왕과 왕실과의 논쟁으로 얻어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 의식의 유지와 관련하여 유교 성리학을 정치철학으로 표방하 는 사대부로 대표되는 조선의 지식인들은 국왕과 왕실에서 여전히 고려 의 불교적 관습과 관행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다. 15세기의 유교와 불교의식의 대립은 국왕과 왕실로 대표되는 힘과 유교적 소양을 갖춘 힘 들 간의 간접적 대립양상으로 펼쳐졌으며, 결국 국왕과 왕실이 양보를 하 는 선에서 일단락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중종대의 기신재 혁파와 수륙재의 폐지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졌 으며, 명종대와 선조대에도 계속해서 존속해 가고 있었다. 이것은 성리학 을 공부하는 유생들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입장에서는 유교적 예 (禮)의 논리를 펼치면서 계속 지속시켜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16세 기 유・불 의식의 갈등 상황에서 불교계의 입장이 분명하게 기록된 문헌 을 찾을 수는 없다. 그보다는 실제의 의식집 혹은 불교 의례문으로 알려 진 청문(請文)의 존재를 통해 간접적으로 불교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 게 된다. 청문이란 오늘날 불교 의식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불(佛)·보살 (菩薩)을 청하는 글이다. 여기에는 청문의 방법과 내용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법식(法式), 의식(儀式)의 절차, 진언(眞言) 등을 수록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선조7년(1574) 안변 석왕사에서 개판한 목판본을 중심 으로 청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자료를 통해 16세기 유・불 의례 의 갈등에서 불교계는 종국적으로 불보살에 대한 공양(供養)과 조사와 영 가들을 위해서는 영반(靈飯)과 시식(施食)을 반영했다는 것을 살필 수 있 다.
본 글은 선조 17년(1584)과 18년(1585)에 개최된 기영연(耆英宴)을 그림으로 기록한 <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를 중심으로 16세기 사연용(賜宴用) 화준(花樽)과 주 준(酒樽)의 조형 특징을 구명하고, 사연에 있어서 두 종류 준(樽)의 진설 방식과 및 진설 의 미를 고찰하였다. 연회에 등장하는 여러 기물 가운데 준화(樽花)를 꽂기 위한 화준(花樽)과 선온(宣醞)을 담았을 것으로 보이는 주준(酒樽)은 16세기 관요에서 제작된 좋은 품질의 백 자․청화백자로 추정된다. 사연용 화준은 조선 전기 국가 의례서(儀禮書) 및 조선 후기 궁 중연(宮中宴) 관련 기록에서 확인되는 호(壺)와 재질․기형․품질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식에 있어서 문양을 생략하거나 청화(靑畵) 문양이 장식되었을 경우 소재 는 대나무․매화․화당초문 등 화훼문(花卉文) 계통을 채택함으로써, 사연의 설행(設行) 목적을 투영하는 동시에 궁중연 용준(龍樽)과 차별화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선조조기영회도> 에 묘사된 주준용 뚜껑은 입구의 가장자리가 위로 살짝 들려 있는 특징에 기인하여 연엽(蓮 葉)형 뚜껑으로 명명하였다. 연엽형 뚜껑은 국가 의례용기, 가마터 출토품, 전세품 등에서도 공통으로 확인되고 있는 만큼, 뚜껑의 사용처와 용도에는 왕실 및 사연용 주준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16세기 <선조조기영회도>의 화준․주준 진설 방식과 사연도(賜宴圖) 속 진설 방식 을 종합해보면, 16세기 화준은 다양하고 유연한 방식으로 진설 되지만, 주준의 경우 획일화 되고 고정된 진설 방식을 보인다. 화준․주준의 진설 방식은 연회의 주최자인 왕의 교체, 임 진왜란으로 인한 제작 여건 및 관련 기록 소실로 인한 고증의 어려움 등으로 인하여 17세기 이후 점차 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16세기 사연용 화준․주준의 진설 방식은 18세기 이후 양상과는 상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16세기 기영연에 화준․주준이 모두 진설 되 었다는 사실은 이 연회가 문헌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대된 사연임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근 거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