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의 목적은 만해 한용운(1879~1944, 이하 만해)의 일제 통치시기에 선명상적 사유를 기반으로 형성된 시를 중심으로 마음을 힐링하고 시대극복 성 찰과 희망의 메시지가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데에 있다. 일제의 어떠한 회유와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불굴의 정신으로 조국독립 과 인류평화를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던 만해에게 시를 쓰는 것은 그 자신에 대 한 고백이며, 고난의 극복 힐링 명상이며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생명사랑 을 실천하고자 하는 몸짓이었다. 여기에는 풍부한 선시적 이미지로 은유와 상 징, 비유와 역설을 통하여 보다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농축되어 있다. 그 결과물이 『님의 침묵』이다. 특히 시집 『님의 침묵』(1926)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조국・ 부처 등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며,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 일제 강점기 의 암울한 민족상황을 가장 압축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비록 ‘님’은 침묵하였지 만 만해는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님’을 찾아내어 어두운 현실을 살아가는 조 선 민족의 가슴에 현실극복의 의지와 자유와 평화가 담보된 독립 국가와 인류 평화를 찾으려는 무한한 자긍심과 연대의식을 심어주고자 하였다. 그래서 만해 에게는 만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화합하는 사랑과 평화의 관계망 구축이 그 의 유일한 화두였다. 그것은 나와 세계가 하나로 이어진 일체동근이라는 삶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모든 생명존재가 상호 연기적이며 상 호의존의 화엄적 세계관을 역동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시적 방편이라 할 수 있 다. 따라서 동체대비의 생명존중과 자유와 평등 기반의 깊은 사유에서 형성된 만해의 선적 사유의 명상 시들은 일제 강점기라는 어두운 시대의 고난을 극복 하고 해방된 미래를 지향하게 하는 치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담론으로서 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만해 한용운의 온라인 연보를 기획할 때 고려할 지점들이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데에 있다. 연보는 ‘개인 삶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의 기록’으로, 삶의 방향 제공, 학술 연구 자료, 특정 이미지의 사회적 유통 경로 등에서 중요하다. 그럼에도, 연보 연구는 평전(評傳)을 위한 도구론적이나 개인 활동의 발굴 및 기록 차원에 머물러 미진하다. 이 연구가 종교인들의 온라인 연보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고려할 부분은 연보가 온라인 서비스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상황이다. 이 상황은 연구자들이 온라인에서 어떻게 연보를 구성하고 구현할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관심은 연보의 개념적 요인들을 고려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이 연구를 위해, 제2장(연보의 개념적 요인들)에서는 개인과의 연관 여부, 사실 여부, 내용을 선별한 기준의 합리성 여부 등 연보에서 개념적으로 고려할 요인들을 검토하였다. 이 요인들은 어떤 연보일지라도 ‘개인과 명확히 연관된 사실들을 최대한 찾고, 합리적 기준을 적용해 중요 내용을 선별해야 한다는 원칙’을 토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3장(연보 사례와 구현 방식들)에서는 온라인 연보 사례를 종교와 무관한 사례, 종교인 사례, 해외 사례로 구분해 구현 방식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각 사례에서 내용 범위의 제공 방식, 스토리 배치(story layout), 공간적 이해를 위한 지도, 번역 서비스, 동료의 연보 서비스, 중요 정보의 별도 서비스, 종교사적 맥락 서비스, 동일 시기의 주요 사건 제공 서비스, 핵심어와 설명문 서비스, 연보의 다양한 형태 등을 확인하였다. 제4장(만해 연보의 구성과 구현)에서는 만해의 연보 기록을 위한 개념적 요인들과 온라인 연보에서 고려할 방식들을 제안하였다. 전자는 개인의 연관성, 사실 여부, 합리적 선별 기준, 활용성 등을 포함한다. 후자는 내용 범위의 분절 여부, 공간적 이해, 개방성, 스토리 배치 등을 포함한다. 물론 이 방식들은 연보 설계 방향에 따라 선별적 채택이 가능하다.
본 논문은 서울이라는 특정한 공간과의 상관관계와 교우관계를 중심으로 한용운의 사회활동과 삶의 의미를 고찰했다. 정치적·사회적 지향이 강했던 한용운에게 서울은 사회적 실천의 무대이자 핵심적 공간이었다. 한용운의 서 울에서의 활동은 심우장 시기를 전후로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북촌시 대 한용운은『유심』이나『불교』발간을 통해 여러 방면의 저명인사와 교류하 면서 3·1운동 참여, 불교청년운동, 신간회 참여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한용운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회활동에 매진했고, 그 결과 몸 과 마음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1933년 한용운은 결혼을 계기로 성북동 심우장이라는 곳에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명의로 삶의 공간을 소유하게 되었다. 심우장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한용운은 처음으로 주거공간과 사회활동(업무) 공간을 분리시킬 수 있었다. 불교도로서 초심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참된 구도를 통해 사회적 실천을 이 어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심우장 이사의 중요한 동기였다. 성북동 심우장은 한용운의 주활동 무대였던 북촌지역과 도보로 왕래가 가능할 정도로 서울 도 심과 가까우면서도 참선 수행이 가능한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한용 운은 지론인 생활선의 실천공간으로 안성마춤이었다. 심우장시대는 한용운의 자유로운 영혼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일제의 협박과 회유로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변절하고 전향했으나 한용운은 일제의 어떠한 유혹이나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한용운은 변절자들과 공개적으로 절교를 선언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김동삼의 유해를 모셔와 장례를 지내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계속했다. 그런가 하면 일 제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민족의 지조를 지킨 소수의 지사들과 마음을 열 어놓고 교류하면서 엄혹한 시기 민족의 앞길에 희망을 던져주었다. 그런 의 미에서 심우장은‘전시총동원체제기’라고 불리는 일제의 마지막 수탈과 발 악의 시기에 민족지조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였던 한용운은 1920년대 국내 항일운동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신간회의 해체와 일제 의 만주사변으로 인한 국내외의 정세 변화는 한용운이 대외활동을 접은 채 심우장에서 집필활동에 전념하게 되는 외적 영향으로 작용 했다. 이 시기에 한용운은 냉철한 시국인식과 민족적 자각을 바탕으 로 불교개혁을 주장하는 글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이때의 개혁론은 1910년대『조선불교유신론』에서 주장했던 일반적인 불교근대화론과 는 달리 식민지 불교의 모순을 극복하고 조선의 사찰을 통일해야 한 다는 자주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요지는 크게‘총본산의 건 설’과‘불교의 대중화’로 정리할 수 있다. 총본산 건설은 분산된 조선 사찰의 통일과 통제기관의 설립을 뜻하 는 것으로, 사찰 주지의 임면권(任免權)을 확보해야 한다는 자주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 전제조건은 조선불교의 모든 권리를 철 저히 장악하고 있던 일제의 사찰령을 철폐하는 것이었고, 그 이론으 로서 서구 근대화의 특징인 정교분리의 원칙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정교분리에 따라 사찰령을 철폐하고 총본산을 건설하는 주체로서 불 교청년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불교 대중화는 경전의 한글 번역과 인출, 그리고 불교 잡지의 발행 사업에 의한 문서포교의 실천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일찍이 한글의 중 요성을 자각하고 평소 한글로 된 교리의 전파를 강조했던 한용운은 1930년대 초반 안심사 한글 경판의 인출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에 큰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한용운의 불교 대중화 사업은 그 스스로‘조선운동’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 었던 것처럼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불교의 대중 화 주장도 조선적 전통의 인식과 실천운동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용운의 현실 인식과 대응은 일제의 통제에서 벗어나 한국 불교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것에 있었고, 바로 이러한 점이 당시 불교 교단에서 그의 개혁론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후반 불교계의 당면한 과제는‘자주권 확립’과‘민족해 방운동’이었다. 주류적 흐름이었던‘불교계의 자주권 확립’은 전통 불교 생존의 측면은 물론이거니와, 왜색불교에 맞선 우리불교 정체 성의 수호와 함께 불교의 대중화 및 활성화라는 측면, 더 나아가 사 찰령 등에 맞서서 우리나라의 전통 불지(佛旨)를 잇고자 하는 노력이 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불교계 인물과는 달리 만해는‘민족해방운동’ 에 보다 중점을 두었다. 만해는 꺼져가는 불법을 되살리고 그 대중화 및 활성화에 천착했지만, 보다 큰 안목으로 일제로부터의 조선 독립 에 더 큰 의미부여를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자주권 확립’ 의 차원에서 한국불교의 주체적 발전 방향을 끊임없이 모색하였다. 초기의 저작인『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만해는 불교적 계몽주의자로 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만해는 이 글에서 불교사상에 기반을 두 지만 서구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봉건적인 불교의 개혁을 주장한 다. 하지만 사상의 원숙기에 이르면서『십현담주해』를 완성하고『유 마경』을 번역한다. 요컨대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만해 사상의 요체는 실천불교인‘대중불교’이다. 만해는 한편으로는 불교를 통해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강렬한 구세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불교계의 출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 강렬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구 세의식은 깨달은 자의 우월의식이 아니라 저자거리에서의 동참의식 이다. 이런 의미에서 만해의 선은 대중들이 행할 수 있는 선이며, 그 가 표방하는 바의 보살행은 구원(救援)이나 시혜(施惠)이 아니라‘더 불어 삶’이다. 만해는 이러한 입장에 대한 구체적 실천을 위한 안을 제시하는데, 그것이「조선불교의 개혁안」이다. 그는 이 개혁론에서 초기의『조선불교유신론』을 계승하면서도 당시 변화된 불교계의 동 향에 유의하여 개혁의 당위성, 그리고 대상과 방법을 제시하였다. 만해를 근·현대 한국불교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선지식 중의 한 분이라고 하는 것은 그에 대한 적당한 표현이 아니다. 오히 려 그는 한국근대사의 중심에서 민족이 가야할 길을 묵묵히 걸어간 지사였다. 만해가 민족운동가, 독립운동가, 선사, 선생 등의 여러 가 지 명칭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그가 항일민족운동에 매진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의 명사로는 그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문학, 사상, 불교, 지성 등 각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행적을 우리에게 남겼 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만해의 개혁은 불교 개혁을 포함하여 철저하게 대중보 다 한 발 앞서 갔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하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저작과 실천을 통하여 봉건불교의 개혁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 식민 지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투쟁의 행적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 다는 점에서도 만해는 우리에게 아주 의미심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