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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老柏軒 鄭載圭(1843-1911)는 1885년 后山 許愈와 함께 南冥의 講學處인 雷 龍亭을 중건하여 南冥의 유적이 복원되고 南冥學이 천양되도록 노력하였다. 1887년에는 8월 18일부터 28일까지 10박 11일의 기간 동안 智異山을 등람하 면서 남명에 대한 추념과 경모를 가졌으며, 자신의 학문과 삶이 새롭게 진작되 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1889년 后山 許愈가 남명학의 핵심을 분명하게 드러 내기 위해 「神明舍圖銘或問」을 지은 것에 동감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 를 자세히 개진하였다. 노백헌이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정 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同鄕의 先賢을 後學으로서 마땅히 선양해야 한다는 책 임감이다. 다른 하나는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당시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유학사적 道統論 속에서 그 의미를 확 신하였기 때문이다. 전자는 노백헌 자신이 생장하고 활동한 三嘉縣이라는 지역 과 그것에 연유한 지역적 정서에 바탕한 것으로, 개인적·지역적 책임감이다. 후 자는 유학사의 맥락 속에서 남명의 위상을 파악하여 남명의 선양이 가지는 의 미를 확신한 것으로, 시대적 상황의 인식과 유학사적 도통의 계승 의지이다. 19세기 강우 지역 학자들은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중심축으로 삼아 분열된 각 학파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유학의 근본 정신을 회복하고 실천 의지를 고양하여 국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망을 바라보려 노력하였다. 노백 헌의 남명학 계승은 이처럼 19세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강우 지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이해한 가운데 그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2.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鄭載圭(老柏軒, 1843-1911) 시세계에 나타난 학문정신을 탐구하 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영 남 기호학파의 문학세계, 그 일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재규의 삶과 문학에 저류하고 있는 것은 강한 호학정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활발한 저술활동과 강학활동은 모두 여기에 기반한 것이라 하겠다. 정재규의 시세계에는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가 학문적 연대를 통해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창작활동은 학문을 위해서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재규의 학문 내용은 그 중심에 율곡학이 있었고, 그 주변에 남명학과 퇴계학 이 있었다. 이것은 그의 학문이 기호학에 연원을 두면서도 영남학으로 열려 있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재규의 시세계에 등장하는 자연은 성리학적 이념과 굳건히 결합되어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시세계는 자연과 문학과 성리학이 일체를 이루며 작품군을 형 성할 수 있었다. 사물에 대한 이념적 인식과 그것의 시적 형상은 정재규의 시작 법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관념성으로 편향되어 있 다고 하기는 어렵다. 유례없는 위난의 시대를 맞아 위기의식에 입각하여 작품 을 창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복령과 단발령이라는 심각한 문화적 위기를 경 험하면서 明末 절의를 지키며 죽어간 중국 선비들을 시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위정척사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정재규 시세계의 의미구조는 단순하지가 않다. 호학정신에 바탕하여 학문적 연대를 통해 작시활동을 전개하면서 선현의 도학을 계승하고자 했고, 또한 다 양한 사물에서 이치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것이 관념으로 흐를 수 있다 는 자각 하에 당대를 극도의 위기적 현실로 인식하면서 사회적 실천을 추구하 고자 했다. 그러나 정재규의 시는 실천정신과 결합되어 있다기 보다 성리학적 이념이 강하게 나타나는 작품이 우세하다. 이것은 그의 시세계가 전통적인 세 계관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자 성리학을 묵수하면서 현실대응을 시도한 당연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는데, 그의 시세계에 이러한 점이 확연히 드 러나 하나의 특징과 한계를 이룬다.
        3.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노백헌 정재규(1843-1911)는 한말의 혼란 조짐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1843 년 경남 합천군 쌍백면 육리 묵동에서 태어나, 개화기의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 에서 일생 실추된 전통유학의 도를 회복하고 확립하는 삶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22세 때 전라도 장성의 노사 기정진(1798-1879)에게 수학하였고, 쇠잔 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남명학의 영향력이 건재하던 강우지역에 노사학을 확립 한 핵심 인물이었다. 정재규는 19세기 중반 이후 강우지역에서 일었던 학맥의 융합 분위기에도 아랑 곳 않고, 기정진을 집지한 이후부터 일관되게 노사학에 매진하였다. 인근 타 학맥의 학자들과의 친밀한 교유, 치열한 논쟁 등을 통해 그들의 학설을 접하고 수용하면서도, 강우지역에서 일어나는 여타의 강회나 인 근 명승으로의 유람 등을 통해 학문적 결속력을 심화시킨 것 등은 모두 노사학 의 전파와 확산을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일생 강우지역에서 스승의 학맥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전력을 다한 인물이었다. 이렇듯 일생 전통유학의 도를 扶持하고 이를 통해 난세를 극복하고자 했던 노 백헌의 정신은 사후 그 문인들의 학문 활동에 의해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 정 재규의 이러한 삶과 학문 활동이 개화기라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대처방식이었다 할지라도, 이는 당시 종래의 전통유학을 고수해 오던 노백헌이 택한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4.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鄭載圭(1843-1911)의 학문정신과 󰡔대학󰡕 해석에 대해 살펴본 것으 로,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정재규는 인륜이 무너져 금수의 세상이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守正主義를 강조했고 衛正斥邪를 부르짖었다. 그는 도 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守死善道意識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를 보전 하기 위해 讀書種子를 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정재규의 학문방법은 독 서를 통한 지식을 실생활에서 체찰하는 隨事省察과 자신의 몸에 돌이켜 실천하 는 反身踐實로 요약된다. 이는 分殊 속에서 理를 구현하려 한 주리론적 사유를 반영한 것이다. 정재규의 󰡔대학󰡕 해석 기본관점은 ‘新民도 明德 속의 일’로 보는 명명덕에 치 중한 해석과 팔조목 가운데 反身踐實에 해당하는 修身에 치중한 해석이다. 해 석의 주요 특징으로는, 1)反身踐實의 관점에서 誠意를 󰡔대학󰡕의 골자로 본 점, 2)「大學章句序」의 分節이 선유들의 설과 다르며 性․敎에 중점을 두어 성인의 가 르침을 따라 본성을 회복하는 일을 말한 것으로 본 것, 3)明德을 ‘天之明命’과 연관시켜 理로 보고, 心合理氣를 전제로 하되 心은 氣之精爽, 明德은 心之无妄 으로 보아 理主氣資의 입장에서 心 속에서 眞實无妄한 본체를 명덕으로 본 것, 4) 正心을 全體主宰處에서 照管하는 것으로 보아 장구의 ‘敬以直之’에 천착해 體까 지 말한 것으로 보는 설을 따르지 않고, 用의 측면만으로 본 것 등을 들 수 있다. 정재규의 󰡔대학󰡕은 해석을 경학사적 시각에서 보면, 주리론적 관점에서 明德 를 理로 보아 이에 치중해 해석한 것과 反身踐實의 관점에서 성의․정심에 치중 한 해석을 하면서 齊家 이하를 수신의 實事로 본 것이 시대적 변화에 대처한 그 의 새로운 해석성향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