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 금속공예는 仿古銅器와 金銀器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방고동기 는 예제개혁과 회복을 통한 권력강화를 위해 황실 주도 하의 진행된 금속공예였다. 북송의 방고동기는 휘종대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고, 상대 고동기의 기형과 서주 고동기의 명문을 적용하였으며, 부분 주조 후 접합하는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남송대 방고동기는 紹興, 紹熙 연간에 주로 제작되었고, 宣和博古圖를 바탕으로 淳熙釋尊制度圖, 紹熙州縣釋奠儀 圖와 같은 예서를 활용하여 새로운 경향의 방고동기를 만들었다. 송대의 금은기는 재질의 희소성에도 불구하고 사용이 보편화 되었는데, 東京夢華錄등 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송대 금은기 사용의 보편화는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의미하 는 것으로 금은기 소유는 제한적이지만, 사용은 영업장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었 다. 송대 금은기는 협층법과 거푸집 단조 등 전대와는 다른 기법으로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협층법은 기형의 중후함과 내부를 매끄럽게 만들어 사용이 편리하였고, 거푸집 단조는 동일 기형을 대량생산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문양 표현에서는 화훼문과 인물고사 등이 주요 문 양으로 등장하였고, 타출기법으로 문양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송대 방고동기와 금은기는 재질과 기형, 문양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금은으로 방고동기를 만들고 고동기의 문양을 금은기에 적용한 것은 당시 금은기에도 방고동기의 영향이 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송대 금속공예의 두 가지 축인 방고동기와 금은기의 소유는 황실과 관료 등의 지배층에 국한되었지만, 소비와 사용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방고동기의 사용은 황실과 관료 등 지배 층에 국한되었지만, 금은기는 영업점에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던 공예품이었던 것이다. 송 대 방고동기와 금은기는 역할의 차이가 있었지만, 황실에서 민간으로 그리고 상품화로 다양 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 송대의 금속공예의 두 가지 축이었다.
Based on the arrangement of the excavated bronzes at the tomb of Marquis of Haihun Liuhe of the Western Han dynasty in Nanchang Jiangxi, this paper first discusses the naming and function of the bronzes, which points out that the four liters is juan-basin, ten liters is pan-basin, twenty liters is pen-basin, the function of xing-warmer also be providing heat preservation of food, Zhong is dedicated to the large size of wine vessel. Secondly, from the period, the bronzes of Liu He’s tomb are divided into four groups, which are Zhou Dynasty bronzes, King of Changyi bronzes, the bronzes of Liu He who were deposed to the ruins of the Changyi and the bronzes of Marquis of Haihun, which belong to Liu Bo, Liu He, Li Jiaji and Nanchang. In addition, on the combination of Liu He’s tomb musical instruments, which are chime of 14 niu-bells, 10 yong-bells, and more than 10 pieces of iron stones, could be three sets on the three sets of musical instruments, which could be hung along three sides of the hall: the musical instruments assemblage match the rite for the rank of a marquis.
조선후기 서화고동의 수장과 감상은 명대말기 문인 문화의 수용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는 서적의 수입을 통해 수용되었고, 당대의 문집 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당시의 서화고동의 수집과 감상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서 수장가들은 고동, 서화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건물을 가질 정도로 많은 서화고동을 수장하고 있었다. 조선후기 고동기 수집과 감상의 경향은 명청대의 고동기 방제의 경향을 따르고 있어 상주 대 고동기를 비롯해 명대 선덕로의 방제가 주요한 수집과 감상의 대상이었다. 조선의 고동기 수집과 감상은 주로 鼎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현재 남아있는 것들은 대부분 18~19세기 조선에 유입된 것들이다. 조선후기 고동기 수집과 감상 열기로 인한 감식서도 등장하는데,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운지」권5 <예원감상>의 고동은 당시 고동기 수집과 감상에 필요한 다양한 내용을 『동천천록』, 『준생팔전』 등 명청대 고동기 수집과 감상의 대표 서적을 인용하여 작성한 것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고동록」에도 당시에 유행하였던 고동기의 종류와 등급 등을 언급하였는데, 박지원은 인용 근거를 명시하시 않았지만 『준생팔전의 내용과 같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서유구와 박지원이 인용한 『준생팔전』의 내용 중 고동기 등급과 평가에 대한 것은 북송대 편찬된 『선화박고도』를 따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지배층의 고동 수집과 감상의 경향은 문왕정과 선덕로로 대변되며, 문왕정은 유교적 대의명분이 강하였고, 선덕로는 명대이후 향로의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기 때문에 조선 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따랐던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