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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漢)나라 시기의 유교 사상은 지속적이며 안정적인 지배사 회에 이념적 영향력을 끼치지 못해 불교와 도교 사상의 도전에 직면해 왔다. 이후 수・당(隋・唐)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과거 (科舉)제도가 발전하게 되면서 유교의 경세치용(經世致用) 사상 이 정치에 전면적으로 제도화되어 권위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큰 변혁은 서예술과도 깊은 상호작용을 이루게 되었다. 안진경 (顔真卿) 해서는 정연하고 웅장한 스타일과 강직하고 위엄 있는 기백으로 한(漢)나라 시대 동중서(董仲舒)가 주창한 ‘대일통(大 一統)’ 학설과 긴밀히 연결된다. 예를 들면, 현재 전하는 안해 (顏楷)의 진적(真跡)인 <대당중흥송(大唐中興頌)>이다. 본 연구 는 <대당중흥송>를 대상으로 미학적 분석과 철학적 해석의 방 법을 이용하여 그 뒤에 내포된 당나라 유가사상이 서예예술에 미치는 심오한 영향과 형성과정을 깊이 탐구하고자 한다. <대당중흥송>은 자획(字劃)이 단정하고 당당하며 기세가 웅 장하여 유교가 추구하는 중용(中庸)정신과 평화롭고 강직한 미 학 이념과 매우 일치함을 알 수 있었다. 아울러 서예와 전통문 화 가치관의 깊은 융합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 다. 본 연구는 유학 사상이 서예에 미치는 영향과 <대당중흥 송>의 미학적 분석 및 심미적 가치의 세차원 경로를 통해 <대 당중흥송>에서 유학 사상과 서예 예술의 상생(相生) 관계를 탐 구하고자 한다.
        6,300원
        2.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최치원은 12세에 唐으로 유학을 떠나 6년 만인 18세에 賓貢科에 급제하여 현지에서 관료로 활동하였다. 16년 동안의 당 나라 생활, 그 리고 28세에 귀국한 이후 신라에서의 활동에서 그는 탁월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여기에 더해서 그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하면서, 그의 학문은 곧 ‘詞章學’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받 아들여졌다. 그런데 이 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기본적 으로 최치원의 학문이 사장학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서도, 그의 학문이 정말 우리가 믿고 있는 만큼 순수하게 사장학적인가 하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자 출발점이다. 최치원의 유학사상에 사장학이 아닌 새로운 지향이 함축될 수 있다 는 점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무엇보다 그가 당나라에 들어가기 50여 년 전, 흔히 송명리학의 선구로 알려져 있는 한유나 이고 등에 의해 이미 유학의 질적 전환이 시도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이들의 활동이 당시 크게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새로운 방향으로의 첫 걸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당나라 중기 이후 사장학 내부에서 발생한 이와 같은 변화의 흐름을 최치원이 직간접으로 계승하고 있는지 여부 는, 결국 한유와 이고 등의 지향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것과 함께, 그와 유사한 지향을 최치원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핵심이 된다. 이 글에서는 최치원에게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 첫째로 사장학 의 한계와 함께 그것을 넘어서는 학적 체계를 인정하는 탈사장학적 특징, 둘째로 직접적으로 성리학과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는 지향을 구분하여 살펴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최치원으로부터 우리는 사장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탈사장학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經典의 전통보다는 四書의 전통을 준비하고, 공자와 맹자를 道統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성리학을 향한 발걸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충분히 사장학으로부터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사장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그에게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3.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물천 김진호는 19세기 말 영남 강우지역에 활동하였던 저명한 학자로서, 그 의 학문은 성재 허전의 예학과 한주 이진상의 이학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 다. 본고에서는 예학의 관점에서 그의 예설을 개괄하고, 그가 제안한 독특한 예 설의 내용과 그 성격을 검토하였다. 이를 통하여 본다면 김진호는 허성재 예설 의 충실한 계승자로서 그의 예설은 대부분 허성재가 편찬한 󰡔사의󰡕에 근거를 두면서 성재의 예설을 옹호 계승하는데 할애되었다. 이런 점은 그가 사의의 교 정과 중간을 주도하였다는 사실과, 또 그가 독특하게 제안한 「正服不變說」에도 잘 나타난다. 따라서 물천은 허성재의 예학을 충실하게 계승 전파하는데 기여 한 예학자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