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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2

        1.
        201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태정관지령의 관련성을 간단히 논하면 다음과 같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2조 a항은 ① 독도에 대한 미국의 제한된 정보와 ② 1905년 이전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간주된 적이 없다는 두 가지의 점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① 울릉도 쟁계에서 일본이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했고, 태정관 지령이 이를 승계한 것이므로 적어도 1699년 이후 일본에 의해 독도는 한국의 영토 로 인정되어왔다. ② 아무리 양보를 해도, 적어도 1905년 일본이 독도 편입 조치를 취하기 이전에 까지 태정관지령은 계속 효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일본에 의해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이 인정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독도에 대한 한국의 관할권을 인정할 만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일본에 의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이 인정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독도에 대한 한국의 관할권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③ 앞의 ①과 ②가 사실인 이상, 미국의 제한된 정보라는 것은 결국 1905년 일본의 독도편입조치 이후의 정보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1905년의 일본의 독도편입을 사실로서 전제를 하고 작성된 샌프란시스 코조약 제2조 a항에 대한 해석은 변경을 요할 수밖에 없다. 즉 제2조a항에 독도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일본이 포기해야 할 섬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샌프란시스코조약 제2조 a항은 미국의 잘못된 정보에 의해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일본의 자기부정에 해당한다. 태정관 지령의 현재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2.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메이지(明治) 초기 일본의 국가최고통치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의 기능과 성격을 밝히고, 1877년 독도의 영유권애 관련된 ‘태정관지령(指令)’의 의미와 효력을 분석한 것이다. 태정관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행정부의 최고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을 통할하는, “천하의 권력은 태정관에 귀결되는” 국가 최고통치기관이었다. ‘태정관지령’으로 사법부의 판결도 무효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태정관이 발하는 법령의 형식으로는 포고布達, 달達, 고시, 지령이 있다. 1886년에 ‘공문식公文式’의 제정으로 포고와 달은 법률로, 그 이하의 법령은 내각 및 각성의 명령 즉 각령 및 성령 등의 형태로 흡수된다. 지령은 하급기관의 질의에 대한 유권해석의 성격을 가진 회답이다. 1877년의 독도관련 ‘태정관지령’은 내무성괴 시마네 현의 질의에 대한 태정관의 유권해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태정관지령’은 영토(주권)의 판도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질의를 한 하급기관만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전체에 효력을 미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즉 1877년의 ‘태정관지령’은 헌법의 영토조항에 상당하는 가치를 기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의 법령이 그 후에 제정된 법령에 모순되지 않는 한 현재까 지도 그 효력이 미치는 것으로 봐야하기 때문에, 독도의 조선 귀속을 확정한 1877년의 ‘태정관지령’은 현재도 유효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연장선상에서 헌법적 가치를 지닌 ‘태정관지령’을 무시하고 일본이 1905년 2월 시마네 현 고시를 통해 독도를 편입한 것이 법리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일본 정부가 태정관지령의 변경을 명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취한 시마네 현 고시는 상위 법령(태정관지령)을 위반한 무효의 행위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정치한 이론화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