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명교체기에 발발한 난수산의 난은 명나라 초기 중국 동남해안 해상 세력의 첫 번째 반란으로 명나라와 그 후세의 동아시아 해양정책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 쪽 사료에는 난수산의 난이 평정되었을 때 때까지 만 기록돼 있어 반란자인 난수산민들에 대한 후속처치 결과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20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학자들은 『이문』,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한국사료를 이용하여 난수산의 난이 진압된 후에 난수 산민들이 한반도로 망명하게 된 경위를 밝혀졌다. 하지만 대부분 연구 성과는 사건 자체가 동아시아 해역의 국제정세에 미치는 영향을 중점적 으로 분석하였기 때문에 사건의 주인공인 난수산민들이 한반도에 망명하 게 된 후에 정착한 ‘이주’ 속성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본 연구는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동아시아 이주사의 시각에서 한반도에 정착한 난수산민 들의 도주 행방, 인원 구성, 활동 지역, 생계 활동 등에 대한 분석을 통 해 그들이 한반도 서남해안지역을 이주지로 선택한 이유와 이주 이후 어 떻게 생활했는지를 밝혔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이주사 연구의 새로운 역사 실마리를 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올해는 한·일합병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나 일본정부는 근래 다시 한 번 독도(竹島)가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여 한·일 지식인의 분개를 야기하였다. 우리는 번영되고 조화로운 동아구역환경을 건축하기 위하여 일본이 추구했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과 일본의 역사관에 대해 다시 살펴보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한·중·일 세 나라는 지리상으로 상호 인접해 있는 국가로서 또한 예로부터 문화전통이 서로 융합되어 왔다. 각자의 경제발전과 경제 상호 보완성의 존재는 합작을 강화하는데 요구를 제출하고 또한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지역경제의 진일보 발전에 따라 중국과 한국,일본의 경제는 이미 한데 얽혀 있고 한·중·일 경제 발전은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되는 정도에까지 도달하였고 서로간의 의존성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졌다. 한·중·일의 이러한 형세 하에 국제경 쟁력을 제고하기 위하여 반드시 일종의 구역 경제일체화 조직을 건립하여야 한다. 한·중·일의 자유무역구의 건립은 세계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발전도상 국가와 발달한 국가간의 연합에 의해 만든 자유무역구이다. 이 지구는 곧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유리한 지위에 처하게 될 것이고 자유무역구는 세 나라에 더욱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며,‘삼영(三盧)’의 국면이 나타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새로운 동북아공동체의 건립은 여기에 속한 모든 나라가 배척 성을 극복하고 상호 이해를 확대하며,공동한 생존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