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우 곽종석은 한주 이진상의 수제자로 寒洲學派를 대표하는 학자였다. 그는 당시에 이단으로 배척받던 한주의 성리설을 수용하였고, 그가 한주에게 執贄의 禮로 올린 지의록은 한주 성리설의 입문서가 되어 경상우도의 신진 학자들 사이에 두루 읽혀 한주학파의 형성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면우는 지의록에 대한 한주의 답변 중에서 유독 氣質之性 한 조목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여 한주와 논변하였다. 喜怒哀樂의 감정이 일어나기 전인 未發 상태에서 기질이 있느냐 없느냐, 기질의 개념이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 제를 가지고 논변을 전개한 것이다. 면우는 관점을 달리하는 논거를 두루 제시 하며 기질지성을 희노애락 미발의 상태에서의 性의 개념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 했고, 한주는 자신이 朱子의 晩年定論이라 믿는 설에만 의거하여 기질지성은 性의 개념이 아님을 강조했다. 즉 면우는 기질은 성과 함께 태어날 때부터 형성 되는 것이니, 기질에 의해 제약된 성이라 할 때 ‘기질에 의해 제약된’까지도 성 의 개념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주는 성의 時分인 미발에서는 氣가 작용 하지 않고 성의 본체만 온전히 드러나므로 기질을 성의 개념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면우는 실상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한주는 개념 정립을 중시 했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면우는 기질지성에 대한 기존 학설들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한 주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고증한 주자와 퇴계의 만년정설만을 논거로 삼았다. 면우는 ‘미발 상태에서 기질이 없지는 않지만 기질을 말할 필요는 없다’ 한 한 주의 결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면우가 기질지성에 관한 기존 학설의 개념들을 다 부정한 것은 아니다. 면우는 미발을 性의 상태로 규정, 기 질이란 개념을 용납하지 않는 한주의 학설을 수용하면서 여러 관점에서 기질지 성의 실상과 개념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면우의 이러한 학문 성향이 그 후에 나오는 그의 학설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추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이 문제는 스승인 한주의 학설과 대체에서 다를 수 없는 면우의 학설 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도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본고는 그동안 지금까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俛宇 郭鍾錫(1846- 1919)의 傳 6편을 검토하여 본 것이다. 면우는 文에서의 道의 중요성을 절실히 인식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문의 역할 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문과 도는 구분될 수 없다고 본 그는 이들을 하나로 묶는 사람의 역할을 중요시 했다. 문의 목적을 明道에 두어 문은 義理에 근본하 여야 한다고 보았다. 「李德敏傳」은 25세(1870)에 지은 작품으로 忠毅膽略을 지녔으나 때를 만나 지 못해 능력을 펼치지 못한 인물인 이덕민을 칭송하고 한편으로 안타까워했 다. 이덕민의 梅溪集을 수용하면서도 작가적 솜씨를 발휘해 이덕민의 인물됨 을 효과적으로 형상화시켰다. 논평에 면우의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河孝子傳」은 58세(1903) 때의 작품으로 효자 河達圭의 14세 때의 행적을 주로 다루면서 감동을 통해 남을 변화시킬 수 있는 효성의 힘을 강조했다. 69세 (1914) 때 지은 「金孝子傳」은 金致明을 입전대상으로 하였다. 奇異事가 나타나 는데 일의 결정의 기준을 부모의 뜻에 두는 김치명의 효심을 드러냈다. 60세 (1905) 때에 宋義用의 婦인 密陽 朴氏를 입전한 「宋烈婦傳」에는 군자도 행하기 어려운 道를 행한 烈婦에 대한 기림과 당시의 세태에 대한 한탄이 나타나 있다. 69세에 지은 「洪烈婦傳」은 주인공의 身體 毁損 사실이 나타나며 평결부가 길다. 주인공의 자결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른 부득이한 행위였음을 강조하였다. 「殷孺人傳」은 68세(1913) 때의 작품으로 입전대상은 咸昌의 선비인 金啓烈 의 妻 幸州 殷氏이다. 면우는 門人인 殷氏의 長男 基浩를 통해 은씨에 대한 정 보를 습득하였다. 주인공이 여자의 몸이었음에도 士君子의 德을 지녔음을 나타 냈다. 賢母良妻의 전형인 주인공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등장 인물의 發話가 빈번히 나타난다. 면우 전의 특징은 評結部에서 論評이 두 번 행해지는 점이다. 이는 총 6편 중 4편에서 나타난다. 논평 1에는 주인공의 행적에 대한 칭송이, 논평 2에는 작가 의 사상․창작관 등이 나타나 있다. 기존 전의 결말부에서 행해지던 논평의 예를 수용하면서도 논의를 확대할 수 있는 방편으로 또 한 번의 논평을 하여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담았다. 면우는 傳을 통해 당시의 사대부의 각성을 촉구했다. 또 한 윤리가 무너진 현실도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의 변치 않는 道를 중요시했다. 그는 孝烈 등의 행위는 남의 인정의 여부와 관계없이 고귀하다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