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조선 말기 경상우도의 유학을 대표하는 재야학자 后山許愈(1833-1904) 의 한시에 대한 연구다. 朱子와 退溪의 학문을 잇는 데 평생을 진력한 학자였으므 로, 詩學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 허유는 문장 공부 에 주력하였고, 특히 韓愈의 글을 좋아하였다. ‘愈’라는 이름 자체를 한유에서 가 져 왔거니와 退而역시 한유의 자 退之에서 한 글자를 바꾼 것이다. 별호 南藜子 는 한유의 호 蒼藜에서 가져온 것인데, 남쪽 땅의 한유라는 뜻이다. 그러나 허유는 서른 살 무렵 文學을 멀리하고 儒學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李 震相을 스승으로 삼아 主理說을 배우고 깨우쳐 李震相학문의 핵심인 太極과 動 靜, 人心의 主資, 人物의 性凡, 華夷와 王伯의 구분 등을 탐구하였다. 이것이 朱 子와 退溪의 전해지지 않는 학문의 비결이 이에 있다고 여겨 평생 이를 계승하고 자 하였다. 철저하게 理를 중시한 허유에게 문학이 중요하지 않거니와 문학을 하 더라도 역시 理를 主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하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허 유는 문학 자체가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李白, 杜甫, 蘇軾등의 시도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小學과 大學이나 열심히 읽어라 한 것이다. 다만 한시는 당시 사족들에게 생활의 일부였기 때문에 배우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학생들이 여름철을 이용하여 일부의 시를 읽는 것은 무 방하다고 하였다. 李白의 古風五十九首와 杜甫의 北征을 긍정하고 특히 韓 愈의 南山과 朱子의 齋居感興은 필독해야 할 시라 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허유는 한시를 강학의 수단으로 여겼다. 朱子의 시를 즐겨 읽었지만, 주자의 시를 시로 본 것이 아니라, 시를 통해 주자의 뜻을 파악하려 한 것이니, 허유에게 있어 시학은 心學의 일부였다. 허유는 鄭逑등 東方先賢의 시 역시 강학의 도구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논리에서 허유는 벗들이나 후학들에게 시 를 통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히고 또 강학을 권려하였다. 허유는 강학의 여 가에 산수 유람을 즐겼고 그 흥을 청신하고 담박하게 발산하였는데, 그 전범을 陶 淵明에서 찾았다. 그러나 문학보다 학문을 우선한 허유이기에, 시를 강학의 도구로 생각하였던 것처럼 山水역시 수양의 자료나 理를 확인할 수 있는 매체로 삼았다. 허유는 19세기 내우외환의 복잡다단한 시대를 살아간 산림의 학자다. 세상이 복 잡하기에 오히려 心卽理라는 하나의 원리만을 고집하였다. 허유가 이 땅을 떠난 지 이제 100년이 되었다. 세상은 그 때보다 더욱 복잡하다. 복잡할수록 하나의 원 리만을 주장한 허유의 고지식이 오히려 현대 학자에게 경종이 될 수 있다.
이 논문은 后山許愈(1833-1904)의 文學思想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후산이 활 동한 19세기는 勢道政治에 따른 민란과 일본을 위시한 서구 열강들의 침략으로 성리학적 통치 이념과 가치관이 근원적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후산은 이러한 內憂外患의 시대적 변화 속에서 한평생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서 학문탐구와 인재양성에 전념하였다. 그가 행한 학문적 사업은 正學을 수호하고 異 端을 물리치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인조반정(1623) 이후, 침체된 경상우도의 학풍 을 진작시키는 일이었다. 그 결과 후산은 공자․주자․퇴계, 그리고 寒洲李震相 (1818-1886)으로 내려오는 主理的학문의 전통에서 스승인 한주가 내세운 ‘心卽 理’설을 자신의 학문의 귀결처로 삼아, 어려움에 처한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南冥을 비롯하여 이 지역 출신 및 연고가 있는 스승 선배 학자들 의 문집간행과 현장에서의 강학을 통해 지역의 학풍을 진작시키는 일에 심력을 다 하였다. 한편 후산은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왔으며, 특히 맹자 이후, 쇠퇴해 진 유학을 일으키고 六朝시대의 쇠약해진 문풍을 일으킨 韓愈의 문장을 좋아하였 다. 그렇지만 후산은 문장가의 입장에서 문학을 바라보지 않고, 시종일관 학자적 관점에서 문학을 바라보았다. 그 결과 후산은 학문과 인격에 기반 한 건실한 내용 의 문장, 즉 ‘世敎’에 도움이 되는 문장을 추구하였으며, 그 문장은 바로 이치를 밝히는 ‘明理之文’이었다. ‘명리지문’의 구체적 내용은 主理的전통 속에서 正學 을 수호하고 時文인 科擧之文과 俗學인 異端之學을 물리치는 것이었으며, 문체 적 특징도 내용에 걸맞게 화려한 수사적 표현을 배제하고, 담박하고 자연스러운 문체를 선호하였다. 후산은 이처럼 정통 성리학자들이 추구한 문학사상의 기반위에 있으면서도, 나름 대로 19세기가 처한 시대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우선 후산은 문장에 대해 일 정한 효용적 가치를 인정하였으며, 나아가 도가 담고 있는 내용도 성리학적인 내 용뿐만 아니라 현실적․실용적인 내용을 다소 포함하고 있어, 문장의 내용상의 외 연을 넓히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점은 도와 문의 상호관계에서 후산은 도가 들어갈 자리에 ‘理’를 배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리 지문’을 추구한 그의 문장학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한평생 정통 理 學을 추구해 온 학문경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후산이 추구한 문학사상은 영남학풍의 학문적 전통을 수용하면서도, 자신이 처한 지역 적․역사적 입장에서 나름의 문학사상을 견지해 나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后山許愈의 저작 가운데 聖學十圖附錄이 있다. 이 책은 心經附註의 예
에 따라 성학십도를 부록한 것이다. 선배 주자학자들의 글 가운데 보완 해설이
될 만한 글을 싣고, 논란이 될 만한 부분에는 특히 스승인 한주 이진상의 학설을
끌어다 썼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입장을 총론격으로 제시한 統論이 남아 있어
그의 독자적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퇴계와 성학십도를 따라 분명
한 주리적 입장에 선다. 그는 氣가 간여하는 차이와 갈등 등을 고려해야하지만, 중
요한 것은 우주의 근본이고 마음의 본체인 理라고 말한다. 이 源頭에 대한 이해
없이, 현실에 매몰되거나 의론부터 앞세워서는 아니된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퇴계의 주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같다. 그렇지만 그는 한 걸음을
더 나가는데, 氣의 현실적 제약을 퇴계보다 더 가볍게, 낙관적으로 본다는데 있다.
가령, 그는 사단뿐만 아니라 칠정조차 理發이라고 말한다. 일찍이 성호 이익이 이
주장을 편 바 있다. 퇴계는 理氣의 대치를 주목하고, 둘을 균형있데 다루고 있는
데, 후산은 理쪽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는 互發이 理氣의
대치와 갈등이라기보다 조화와 협력을 뜻한다고 말하는 점에서 낙관적이다. 그리하
여 그는 스승을 따라 과감하게 心卽理를 주창한다. 이 주장은 당대의 특히 방산
허훈으로부터 양명학과 선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지경은 참
곤혹스럽다. 왜냐하면 후산 자신, 가장 극력하게 비난하는 대상이 양명학과 선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을,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비난하는 대상과 같다고 손가락
질하는 것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들 사이를 어떻게 갈라볼 것인가. 퇴계와 후산, 그리고 양명과 禪사이의 차이
를 어떻게 갈라볼 수 있겠는가. 나는 퇴계의 자리를 주리의 전형으로 보고, 후산에
게 ‘과격한 주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논평을 맡은 최석기교수께서 이의를
제기했다. 또 나중 최재목교수는 후산의 심즉리와 양명의 심즉리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조언해주었다. 그들 사이의 차이를 확인하고 갈래를 정돈하는 일은
좀 더 뜸들기를 기다리고자 한다.
后山許愈(1833-1904)가 살았던 조선말기는 李震相․朴致馥․趙性家․金麟 燮․崔琡民․鄭載圭․金鎭祜․郭鍾錫등이 진주 인근에 포진하여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학문적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후산은 李滉․金誠一․李玄逸․李 象靖․柳致明의 학맥을 이은 李震相의 문인이므로 외견상 퇴계학맥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10대조는 南冥曺植(1501-1572)의 門人이고 9대조와 8 대조는 모두 남명 私淑人이어서, 후산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명학파의 학문적 전통 을 이미 이어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남명학파는 사라지고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학문이 강우 지역에 깊이 젖어든 이때, 후산이 남긴 神明舍圖銘或問이란 글을 중심으로, 남명학파의 후 예로서 그가 추구하였던 남명학 계승 정신과 그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후산이 1889년에 신명사도명혹문 이란 글을 지은 것은 남명 학문의 핵심을 闡 發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비록 이진상의 문인으로 서 퇴계학맥에 해당하면서도, 자신의 선조가 대대로 남명학파였기 때문에 자신이 당대의 남명학파 중진 학자들의 견해를 집대성하여 이 글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후산은 이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광범위하게 수집하 려 노력하였고, 이를 수용하거나 수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간에 이를 오직 논리에 따라 해결하려 하였다. 특히 쟁점이 되었던 부분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첫째는 神明舍銘註說의 刪削문제이다. 둘째는 神明舍圖교정 문제이다. 셋째는 신명사명 ‘動微勇克' 아래에 있는 自註‘閑邪'의 해석 문제이다. 넷째는 신명사도 의 ‘國君死社稷'의 의미 해석 문제이다. 다섯째는 신명사도 하단 止圈좌우의 ‘必至․不遷'의 위치 문제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학자들 사이에 첨예하게 대립되는 견해가 있기도 하여 매우 번 다하고 수용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후산은 발표한 지 1년이 지난 1890년 무렵 에 이를 거의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후산은 남명의 노장적 면모보다 는 성리학적 면모를 드러내려 하였고, 이는 자신이 퇴계학맥을 이은 학자이면서 남명학파이기도 하다는 데서 학문적 절충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 후산의 이러한 노력이 가져다 준 부수적 효과는 남인 학자들과 노론 학자들 사이에 남명 학파적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1930년대 단성 지역에서 진행 되었던 남인과 노론 학자들 사이의 年例討論모임이 이루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 기 때문이다.
后山許愈(1833-1904)를 배출한 三嘉縣의 金海許氏가문은 경상우도에서 문호 를 유지해 왔다. 고려말기 許麒에 의해서 固城에 정착하여 金海許氏가문을 형성 하였다. 다시 허기의 현손 竹溪許珣이 三嘉縣佳會里德村에 移居하였다. 본래 는 무관의 가문이었으나 竹溪의 아들 晩軒許彭齡이 南冥문하에 나아가 공부함 으로 인하여 武業을 버리고 儒學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晩軒은 南冥을 享祀하는 晦山書院창건을 주도하였고, 창건 이후에 회산서원 에 매달 초하루 焚香할 정도로 남명에 대한 존모의 정도가 지극하여 유가로서의 기반을 확실히 잡았다. 그의 두 아들은 倡義하여 忘憂堂郭再祐휘하에서 군공을 세웠고, 또 형제 둘 다 문집을 남겼으니, 유학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들 滄洲許燉대에 와서, 문과에 급제하여 文名을 날리고, 대북정권에 협 조하지 않는 절조를 지켰으므로 家數를 크게 제고시켰다. 이후 강우의 비중 있는 가문이 되었다. 滄洲의 손자 臥龍亭許鎬는 굉장한 경륜을 가져 북벌을 담당할 將臣에게 세 가지 계책을 제시할 정도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신실한 선비로서 처신하였는 데, 주로 江左의 학자들과 교류가 깊었다. 晦山書院창건을 주도할 정도로 南冥을 존숭하는 가문이면서 아울러 退溪도 존숭하여, 두 대학자의 장점을 융합하여 발전시키려는 가문의 전통적 학풍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倡義를 하는 등 우국연민의 구세정신도 여타 가문보다도 더 강렬 하였다. 이런 전통은 后山에게까지 면면히 이어져, 雷龍亭을 중건하는 일을 주관하고 뇌룡정의 강학을 주도하고 神明舍銘或問이라는 神明舍銘에 대한 역사상 가 장 상세한 주석을 달면서도, 퇴계의 학문을 존숭하여 聖學十圖附錄이라는 聖 學十圖에 대한 精深한 주석서를 내고 있다. 남명과 퇴계를 대립적인 구도로 파 악하지 말고, 후학들이 두 대학자의 좋은 점을 상보적으로 배운다면, 국가민족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 후산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학문은 늘 구세정 신이 있어야 그 존재가치가 있다는 문학관을 갖고서, 문장을 지을 때도 世敎에 도 움이 되지 않으면 지을 필요가 없다고 후산은 생각했다. 후산은 남명․퇴계 우리나라 양대 학자의 학문을 조화롭게 아우른 家學의 바탕 위에서, 寒洲에게 나아가 心卽理說을 배워 계승하여, 19세기 강우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대학자로 성장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렀으며 강우의 학문이 부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