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석(趙榮祏, 1686-1761)은 정선(鄭敾, 1676-1759)이 산수화에서 이룩한 예 술적 혁신을 ‘개벽(開闢)’이라고 평가하였다. 정선 이전에 우리나라 산수화의 주류는 중국의 화풍을 수용・변형시킨 것이었다. 정선 이전에도 실경산수화는 그려졌다. 그 러나 이 그림들은 실경감(實景感)이 부족했다. 1711년, 조선시대 회화에 일대 분수령 을 이룬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정선의 금강산 여행이다. 그는 이 여행을 마 친 후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岳圖帖)>>을 그렸다. 정선이 그의 진경산수화를 통 해 이룩한 거대한 혁신은 무엇이었을까? 정선이 조선시대 산수화에 혁명적인 변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창의적으로 미점(米點)을 금강산 그림 등 그의 진경산수 화 제작에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미점은 북송시대의 화가인 미불(米芾, 1051-1107) 과 그의 아들인 미우인(米友仁, 1086-1165)이 창안한 회화 기법이다. 미점이 사용된 산수화를 미법(米法)산수화라고 한다. 미점은 구름이 끼고 안개가 자욱한 자연의 습 윤한 모습을 묘사하는데 주로 쓰였다. 그런데 미법산수화는 실경산수화가 아니다. 상 상 속의 구름 낀 산을 그린 것이 미법산수화이다. 정선은 중국의 화가들과 달리 미점 을 실재하는 경치를 그리는데 사용하였다. 즉 그는 미점을 구름과 안개가 낀 산의 습 윤한 모습을 표현하는 데 쓰지 않고 실제 경치를 묘사하는데 사용함으로써 미법산수 화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신묘년풍악도첩>> 속 <단발령망금강산>을 보면 단발령을 묘사하는데 많은 미점이 사용되었다. 같은 화첩 속 <장안사>에는 옆으로 긴 점이 나무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는데 이 점은 미점의 변형이다. 정선은 미점으로 조선의 산천을 그렸다. 결국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미점으로 그려낸 실경산수화’라고 할 수 있다. 조영석이 언급한 ‘개벽’은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미점의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사용에서 비롯되었다. <<신묘년풍악도첩>>은 1711년에 정선이 이룩한 회화 혁명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청허휴정(1520~1604)의 심공급제(心空及第) 기반의 깨침과 선명상시 특징을 살펴보는 데 있다. 숭인 장로의 ‘심공급제’의 가 르침을 받아 출가 한 휴정은 임제종의 종풍을 이어받아 마음이 모든 것 의 근본임을 깨닫고 지관(止觀)을 통하여 본래 모습을 찾고자 하였다. 특 히 그는 세상과 절연하여 청산과 백운 속에서 무상함과 깨달음을 구하고 교화하는 의연한 수행 자세를 보여주었다. 깨달음의 세계나 선심은 언어 의 압축과 고도의 상징적 언어로 표현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휴정은 구도 와 깨달음, 보임(保任)과 교화의 과정에 있어 맑고 탈속한 마음의 경계를 가장 절제된 시적 양식의 하나인 오언절구와 칠언절구를 통해 잘 표현하 였다. 이는 곧 휴정의 선명상시의 특징이자 그의 선적 직관과 시적 상상 력이 조화를 이루어 빚어낸 깨침의 미학이다. 선시가 철저한 구도와 깨달 음의 표현이라 할 때, 철저하게 깨닫는다는 것은 나와 너, 그리고 그 모 든 존재와의 관계성을 깨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휴정의 ‘심공급 제;의 선명상시를 읽고 이해하며 감상하는 것은 탐・진・치 삼독으로 번 다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내려놓기’의 지혜와 ‘텅 빈 충만’의 기쁨 을 전해주는 치유적 의미로 작용할 수 있다.
본 연구는 겸재 정선의 쌍도정도에 표현된 지당에 대한 고찰로서 쌍도정지 그림을 실경의 관점에서 조명하여 문헌 및 고지도 분석과 해석과 현장조사 및 향토사가들의 인터뷰 결과를 바탕으로, 현장과 그림 속 실경을 비교하고자 하였다.또한 쌍도정지의 위치 및 입지장소성을 확인함으로써 쌍도방지의 복원의 기초자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쌍도정지는 전통정원 유적의 현장을 비교적 정확히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공간 자체가 매우 유서 깊은공간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발굴을 통한 원형복원의 당위성과 기대가 가일층 간절해진다. 본 연구를 통해서 해결하지는못했지만 1)쌍도정도에 표현된 역학적 도해와 2)쌍도정지의 조영자로 본 고산 윤선도 그리고 겸재 정선과의 관련성은추후 학제적 접근으로 풀어나가야 할 전통조경적 과제로 되새겨야 할 것이다. 본 연구를 계기로 겸재의 쌍도정도에나타난 쌍도정지의 복원은 물론 오늘날 성주군 조선후기 관아정원의 모습 및 전통경관적 산수시스템 등 전통경관의원형복원 및 회복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