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우의 영물시 「戱次人水陸菜品三十八絶」에는 서민들의 생활상, 物 象에 대한 逼眞한 묘사, 格物을 통한 性理의 이해가 나타나 있다. 「희차 인수륙채품삼십팔절」시에는 국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이 애잔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우리의 산과 들, 바다에서 자라는 식재료로 사용되는 식물들이 거짓 없는 진솔함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식용 식물을 통해서도 성리의 본질을 깨닫고자 노력한 성리학자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폭넓은 본초학의 상식으로 국토에 자생하는 식물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면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가 「희차인수륙채품삼십팔절」에서 보여준 작시의 자세는 문학작품이 사회의 문화나 분위기를 알게 해주는 治世의 자료로서의 의미가 있으며, 詩作의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문학관이 반영된 결과이다. 그리고 만물을 대하여 그 속에서 명덕의 이치를 깨달아 성찰하고 日新하는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성리학자로의 모습이 시에 그대로 나타났다. 2,000여 수의 한시가 말해주듯 그는 시작을 꺼리지 않았으며, 물상에 대한 소회를 기발함으로 풀어내기도 하였다. 이는 그가 기발하고 참신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발현된 詩心으로 내면에 온축된 物産에 대한 지식과 감화가 가감없이 형상화된 것이다. 시작에 대한 부정적 입장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표현으로 즐기는 모습을 보였으니, 문학에 대한 그의 식견과 역량을 유추할 수 있는 작품이다.
漢詩는 작가의 입장에서나 독자의 입장에서나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 다. 한시는 작가에게 사소하고 은밀한 정서의 토로를 가장 잘 보장한다. 독자는 한시를 읽으면 작가의 삶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어떤 인물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가 남긴 고담준론의 철학 저술을 읽는 것 못지않게 그가 남 긴 단편의 한시를 꼼꼼히 읽는 것도 중요하다. 俛宇 郭鍾錫(1846~1919)의 한시가 수록된 俛宇集의 편차는 기본적으로 編年의 방식을 따르고 있어 작품의 창작 시기를 대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간 행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한시 작품의 수량은 1,541題 1,998首에 이른다. 16세 부터 59세까지의 작품이 전체 수량의 약90%이고, 을사늑약 이후에 해당하는 60세부터 74세까지의 작품은 175제 255수로 10%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문 집 간행이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작품 분포가 심한 편차를 보이는 것이다. 본 논문은 곽종석의 한시 창작에 대한 태도를 우선 살피고, 이어 자연물을 마 주하여 느꼈던 정서를 토로한 詠物詩를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한 정서를 표현한 한시를 해석해 보았다. 그는 가슴에 감응하는 정서를 자 연스럽게 토로하는 방식의 한시 창작을 긍정하면서 일생 동안 한시를 지었다. 자연을 마주하여 物我一體의 심정을 느끼기도 하고 심성 수양을 돌이켜보기도 하면서 인격을 완성해 나갔다. 이리하여 붕우 간, 사제 간, 가족 간의 인간관계를 우정과 공경과 사랑의 마음으로 유지해 나가는 인격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었다. 한시 작품을 통한 이상의 고찰은 곽종석이 <布告天下文>과 <巴里長書>를 발 송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 일정한 도움이 된다. 민족 간 국가 간 유지되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서로의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상호존중이다. 집단 간의 상호존중은 근본적으로 자연과 인간을 사랑하고 존중할 줄 아는 개 인의 인격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이글은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했던 곽종석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國權恢復의 방안과 성격을 검토한 것이다. 곽종석의 국권회복 방향은 조선이 당면한 국내·외의 시대적 과제를 감안한 토 대 위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그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진출이 본격화한 국제 정세에서 말기적 증상을 보이고 있는 조선의 내부적 모순을 극복하지 않고는 국권이 보장될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內修를 통한 自强의 방안을 모색함과 동 시에 열강들의 역학관계를 활용할 수 있는 외교력의 발휘를 주문했다. 이에 따 라 그는 서구사조의 적극적인 수용을 지향하는 開化의 입장에 동조하기를 거부 했을 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자세로 물리력을 동원해 外勢의 배척을 요구하는 衛正斥邪의 논리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제국주의 국 가들의 침탈에 따른 사상적 혼돈과 국가적 위기를 東道西器論의 입장에서 대응 하되 유학의 현실적 변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실현하는 방향을 모색했다. 결국 곽종석의 국권회복 방향은 국내·외의 시대적 상황에 탄력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유학의 변화를 통한 內修를 토대로 열강들의 역학관계를 활용한 외교 력을 발휘해 민족의 생존을 보장받는 기조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를 위해 그는 열강의 공관에 布告文을 보내 일본을 견제할 것을 촉구했을 뿐만 아 니라 乙巳勒約의 부당성을 제기함과 동시에 五賊의 처단을 주장했고, 파리강화 회의에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며 조선의 독립의 당위를 알리기 위해 長書를 기 초했으며, 상해 임시정부 등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儒林團 대표로서 大同團을 적극 지원하고 나서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역할은 寒洲學派 의 ‘心卽理’說을 이념적 근간으로 정립한 分合論的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는 동아시아 범주에서 벗어난 거시적 안목에서 다양한 사조를 포용적으로 수 용하는 그의 현실인식과 대응자세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