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최초의 한인 선교사가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다루는 연구이다. 흔히 감리교의 홍승하와 장로교의 이기풍을 최초의 한인 선교사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그들이 왜 최초의 선교사인가에 관한 연구는 아직 심도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우선 감리교에서는 1997년 이전까지 국외에 있는 교포들만을 대상으로 사역을 해도 선교사로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1903년 하와이에 파송된 감리교의 홍승하는 최초의 한인 선교사가 맞다. 반면 장로교에서는 1907년에 파송을 받아 1908년에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을 한동안 해외 선교사로 간주 하다가 1915년 이후부터는 그를 더는 선교사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로교는 외국인을 위해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만 선교사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제주도는 국외지역이 아니므로 이기풍을 해외 선교사로 간주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이 논문은 대한장로교회 신경의 변천과정과 장로교회 각 교단의 헌법에 수록되어 있는 현황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서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인식을 연구한 것이다. 1907년에 제정된 대한장로교회 신경은 192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신경, 1934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신조로 이름이 변경되고, 1934년 수정과정에서 문구의 수정 및 단어의 추가나 삭제 등의 부분적인 변화가 있었다. 해방 후 장로교회 각 교단은 대부분 1934년의 조선 예수교장로회 신조를 저본으로 해서 현대철자법에 맞게 수정한 후 헌법에 수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만 예장 고신 교단은 2011년 개정, 공포된 헌법에서 대한장로교회 신경을 삭제했으며, 예장 통합 교단은 1971년 헌법 개정 과정에서 서언을 축소하고, 승인식을 삭제했으며, 제12조의 내용 중 불신자가 최후 심판 때에 형벌을 받는다는 문구를 삭제했다. 현재 대한장로교회 신경은 역사적인 기원과 개정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이 헌법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설명을 첨부하여 이해를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제정한 후에는 그것을 보편적으로 사용 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이 논문은 1930년 이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이 개혁신학이 아니라 복음주의신학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이 논문에서 복음주의의 특징을 세 가지로 핵심요소로 규정한다. 그것은 성서, 회심체험, 영적인 생활의 변화이다. 1930년 이전으로 시대를 한정한 이유는 1930년 이후 신학이 분화되기 때문이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선교초기부터 예배공동체, 성경번역, 순회전도를 함께 했는데, 이런 연합사역이 가능했던 것은 복음주의신학이라는 공유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성서를 통한 사경회를 기초로, 기도를 통한 체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은혜 받은 자의 새로운 생활을 통한 도덕성이라는 복음주의신학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런 성서, 회심체험, 영적인 생활의 변화는 한국교회신학을 복음주의 전통으로 견고하게 뿌리 내리게 한다.
1907년 한국장로교회는 4개 선교부가 하나의 장로교 치리회인 독노회를 조직한다. 이때 채택한 대한장로교회신경은 장로교회와 감리교의 연합정신과 복음주의신학의 산물임을 통해서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이 개혁신학이 아니라 복음주의신학임을 다시 한 번 규명하게 된다.
한국장로교회 신학이 개혁신학이라면 신학교와 학계에서 칼뱅에 대한 교과과정이나 연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과과정과 칼뱅연구를 보면 교과과정은 성경중심이며, 칼뱅연구사에서 1930년 이전까지는 이에 대한 깊은 연구는 없음을 알 수 있다. 한국장로교회의 복음주의 영성은 개인구원과 체험을 강조한다. 즉 부흥적 특성으로 인간의 감정을 강조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그렇지 않다. 복음주의는 개인구원, 개인윤리, 사회관심으로 자연스럽게 발전되어간다.
이 논문은 한국장로교회 동사목사의 기원과 제도적 확립 및 확장과정, 폐지에 이르는 역사적인 과정을 연구한 것이다.
동사목사라는 직제는 미국장로교회의 영향으로 190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회 노회에서 8명의 한국인 목사를 선교사와 함께 일하는 동사목사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이 직제는 제도적 확립과 확장 과정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확대 시행되어 1914년 제3회 총회에서 목사를 위임목사, 임시목사, 위임동사목사, 임시동사목사로 구분했으며, 1917년 제6회 총회에서는 목사를 칭호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하고, 1929년 제18회 총회에서 헌법 중 정치 제4장 4조에 목사칭호 조항을 추가함으로서 동사목사의 제도적 확립을 완결했다. 목회 현장에서는 선교사와 한국인 동사목사 뿐만 아니라 1920년대를 전후해서는 한국인 위임목사와 한국인 동사목사가 함께 목회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이후에는 한국인 위임목사와 위임동사목사, 한국인 위임목사와 임시동사목사가 목회하는 형태로 세분화 되었다.
동사목사 직제는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공동목회를 통한 협동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와 같은 직제가 해방 이후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지속된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영락교회에서 한경직과 강신명이 위임목사와 동사목사로 공동목회를 한 경우다.
그러나 동사목사 직제는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에서 부목사 직제를 신설하면서 폐지되었다. 이런 결정은 동사목사 직제의 역사적 공헌을 간과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동사목사의 폐지와 부목사의 신설은 공동목회를 통한 협동적 지도력 대신에 위임목사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로의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This is a study on the curriculum of church history of the Korean Presbyterian Seminary from 1901 to 1935. The Korean Presbyterian Seminary was established in 1901. The seminary was built for the spread of the gospel not for the research of theology. W. L. Swallen was one of the founders of the seminary and he wrote the first textbook of church history in the Korean language in 1913. The book was entitled Kyohoisaki (敎會史記) : the Book of Church History. The editorial system of the Kyohoisaki was a dictionary of history. The theological foundation of the book was evangelical.
A new text of church history of Presbyterian Seminary was published in the 1930’s. The new text’s theological foundation was evangelical, the same as Swallen’s text. But the level of study of church history was developed further. The new text included the advanced objectivity of historical description, methodology of history and the system of editing. The Presbyterian seminary could offer the academical curriculum of the church history in the 1930’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