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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4

        1.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주지하다시피 南冥 曺植(1501-1572)의 학문은 그의 사후 문인들에 의해 계 승 ․ 발전되어 來庵 鄭仁弘(1536-1623)과 寒岡 鄭逑(1543-1620) 등의 문인 집단에 의해 크게 현창됨으로써 학파를 형성하였으나, 인조반정 이후 내암의 敗退와 더불어 급격한 침체를 맞이하다가 1728년의 戊申事態 이후 존립 자체 가 거의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엽에 正祖가 南冥에 대한 賜祭文을 친히 지어서 내려준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부 경남 지역에 서서히 학문 이 흥기하여 중엽 이후에는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미 退溪學派 化 또는 畿湖學派化한 상황에서의 興隆이었던 것이다. 勿川 金鎭祜 또한 이런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인물이다. 물천은 학 문적 사승관계에 의해 주로 퇴계학파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지니면서도, 자신이 처한 지리적 배경에 의해 자연스럽게 남명학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물천의 남 명학파로서의 면모를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남명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드러난 남명 정신을 숭앙하는 태도이다. 秋霜烈日 같은 粹然한 정신 경계와, 直內方外를 내용으로 하는 敬義之學을 남 명 학문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이를 후학들이 마땅히 추구하여야 할 準的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남명의 학문이 廉頑立懦의 효과가 있다고 하여 남명을 ‘百 世師’로 인식하였다. 둘째, 남명의 구체적 저술에 대한 물천의 생각이 얼마나 깊은지에 대한 자료 는 흔하지 않다. 신명사도에 대한 한두 가지 견해만 보일 뿐이고, 이 또한 남명 의 학문을 자기화한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셋째, 󰡔남명집󰡕 ․ 󰡔학기󰡕 ․ 󰡔연보󰡕 등의 중간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 면서, 기회가 되기만 하면 적극적으로 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尊衛라는 이름 으로 남명의 진면목을 사라지게 하는 것에 대하여는 반대하였다. 이들의 중간 을 주관하던 復菴 曺垣淳에게 기회가 닿는 대로 자신의 견해를 주었으나, 물천 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일이 완성되지 않은 채 복암이 별세하였고 그 얼마 뒤에 물천 자신도 별세하였다. 요컨대 물천은 조선이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기 직전까지 살았던 인물로, 조 선 말기 이후 일제 강점 시기를 살았던 서부 경남 지역의 학자들에게 퇴계학과 함께 남명학에 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 던 인물이라 이를 수 있다.
        2.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后山許愈(1833-1904)가 살았던 조선말기는 李震相․朴致馥․趙性家․金麟 燮․崔琡民․鄭載圭․金鎭祜․郭鍾錫등이 진주 인근에 포진하여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학문적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후산은 李滉․金誠一․李玄逸․李 象靖․柳致明의 학맥을 이은 李震相의 문인이므로 외견상 퇴계학맥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10대조는 南冥曺植(1501-1572)의 門人이고 9대조와 8 대조는 모두 남명 私淑人이어서, 후산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명학파의 학문적 전통 을 이미 이어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남명학파는 사라지고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학문이 강우 지역에 깊이 젖어든 이때, 후산이 남긴 神明舍圖銘或問이란 글을 중심으로, 남명학파의 후 예로서 그가 추구하였던 남명학 계승 정신과 그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후산이 1889년에 신명사도명혹문 이란 글을 지은 것은 남명 학문의 핵심을 闡 發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비록 이진상의 문인으로 서 퇴계학맥에 해당하면서도, 자신의 선조가 대대로 남명학파였기 때문에 자신이 당대의 남명학파 중진 학자들의 견해를 집대성하여 이 글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후산은 이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광범위하게 수집하 려 노력하였고, 이를 수용하거나 수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간에 이를 오직 논리에 따라 해결하려 하였다. 특히 쟁점이 되었던 부분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첫째는 神明舍銘註說의 刪削문제이다. 둘째는 神明舍圖교정 문제이다. 셋째는 신명사명 ‘動微勇克' 아래에 있는 自註‘閑邪'의 해석 문제이다. 넷째는 신명사도 의 ‘國君死社稷'의 의미 해석 문제이다. 다섯째는 신명사도 하단 止圈좌우의 ‘必至․不遷'의 위치 문제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학자들 사이에 첨예하게 대립되는 견해가 있기도 하여 매우 번 다하고 수용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후산은 발표한 지 1년이 지난 1890년 무렵 에 이를 거의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후산은 남명의 노장적 면모보다 는 성리학적 면모를 드러내려 하였고, 이는 자신이 퇴계학맥을 이은 학자이면서 남명학파이기도 하다는 데서 학문적 절충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 후산의 이러한 노력이 가져다 준 부수적 효과는 남인 학자들과 노론 학자들 사이에 남명 학파적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1930년대 단성 지역에서 진행 되었던 남인과 노론 학자들 사이의 年例討論모임이 이루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 기 때문이다.
        3.
        200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泰安朴氏는 晉州에 정착한 지 400년 정도 동안, 凌虛 朴敏 이후에 西溪 朴泰茂·漁隱 朴挺新·訥庵 朴旨瑞 등 두드러진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 강우 지역이 仁祖反正과 戊申亂을 겪은 데다, 이와 관련하여 남명의 학문 자체에 대한 일부 서인 세력의 비판이 있어서, 남명학이 충실히 계승되기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던 것이 사실이다. 태안박씨도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므로, 凌虛의 來庵 師事에 대한 왜곡성 언급이 문집에 실리게 되었던 것이며, 西溪가 密庵 李栽의 문인이 되어 퇴계학파의 학통을 깊이 접하게 되었던 것이며, 눌암은 더욱 그 범위를 넓혀 기호 지방 남인 계열의 대표적 학자인 順庵 安鼎福을 사사하면서 안동 지방의 川沙 金宗德과 立齋 鄭宗魯 등을 사사하여 '南州第一人' 이란 칭송을 듣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반적으로는 서계 이후에 태안박씨는 학문적인 면에서 그 계통이 퇴계학파의 범주에 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명학파의 범주에서 이 문중 인물을 논의한 것은, 이 강우 지역의 역사적 특수성과 관련이 있다. 강우 지역의 인물들은 그 조상이 대체로 남명의 문인이거나 再傳門人으로서, 이미 혈연적으로 남명의 私淑人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學問이나 黨色의 측면에서 퇴계학파와 깊은 관련을 맺었다 하더라도 남명학파적 성향은 여전히 마음 밑바닥에 自在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 門中만의 현상이 아니므로 앞으로 꾸준히 연구하면 강우 지역 남명학파의 모습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4.
        2002.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Due to a series of massacres of Confucian scholars including 'Muosahwa(戊年土禍)' until the early part of the 16th century. many scholars gave up entering on an official career and secluded themselves from the world. Nammyeong(南冥) and Iljae(一齋) also led humble lives in a remote village. They devoted themselves to studying and practicing sacred books including Daehak(大學) The Great Learning-, which is the basic book for the realization of politics based on the rule of right, to cultivate their mind in the way of 'Geogyeonggibui(居敬集義)' and 'Geogyeonggungkyeong(居敬窮義)'. They were recommended as Yuil-those who don't enter into government service, but they were not positive. It is not because they didn't have any intention of government position, but because they thought that their sovereign was not worth working with. Nammyeong(南冥) didn't enter on an official career all life, but Iljae(一齋) did that a while. Nammyeong(南冥) is more complete than Iljae(南冥). However both Nammyeong(南冥) and Iljae(一齋) taught junior scholars through reading and lecture, and they practiced 'Kyeongui'. They always worried about the life of the people and the matters of the nation. Such things are their common points. Especially all of them suggested and practiced 'Kyeon(敬)' as a key point of cultivation and a learning method. When they met the king and advised him on the main point of statecraft. they emphasized that he had to deat with everything through 'Kyeong(經)'-oriented method We can know how positively they practiced 'Neo Confucianism(性理學)' through this. Though Nammyeong(南冥) and Iljae(一齋) won great popularity due to their studies and reputation in the right of Kyeongsang province(慶尙石道) and the north of Honam area(湖南北部), they didn't seem to associate with each other except the fact that they studied together in Seoul, went Seoul through recommendation and exchanged their thought about studies and official career. However it seems that they knew each other well, worried about their future, and had lots of interest and affection. At that time, the dispute on 'Liqi theory(理氣論)' was in full swing, and Nammyeong(南冥), who was positive in practice, didn't state particular opinion. He reconfirmed Zhuzi's viewpoint and expressed his opinion. He had a tendency of 'Liqi monism(理氣一元論)'. This is similar to Iljae(一齋)'s 'Liqi's Unity(理氣體論)' based on Na, HeumSun(羅欽順)'s theory. Many scholars, who secluded themselves from the world, tried to be learned and have interest in 'The Doctrines of Wang Yangming(陽明學)'. 'Liqi's Unity(理氣一元論)' was inclined to 'Neo Confucianism(性理學)'. If we consider the social background, which attached greater importance to theoretical studies than to practice, their theory deserves our atten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