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하씨가 터를 잡고 살아온 사곡마을은 4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거치면서 다양한 역사와 인물, 그리고 문화가 만들어졌고, 이를 반영하는 유적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중 기록물 관련 자료는 송정 종가, 지명당 종가, 묵와공 종중을 통해 고문서, 고서 및 책판의 형태로 남아있다. 송정 종가는 송정 하수일의 장남 琬(1588-1617)으로 이어지는 큰집 계열로, 고문서 109종 133건, 고서 149종 377책, 책판 4종 113 판을 소장하고 있다. 지명당 종가는 지명당 河世應(1671-1727)의 장자 河必淸(1701-1758)으로 이어지는 큰집 계열로, 고문서 3,518건, 고서 636종 1,444책을 소장하고 있다. 묵와공 중중은 默窩 河啓賢(1804- 1869)을 모시는 종중으로 하계현은 涵窩 河以泰(1751-1830)의 6子 (막내)이다. 하이태는 송정 하수일의 8세손이자, 석계 하세희의 증손이다. 이곳에는 수곡의 진양하씨들이 주축이 되어 간행된 『주자어류』 2,072판이 광명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상의 자료는 대부분 2003년 진주권 지역 고문헌 조사 및 2008년 경남권 목판자료 조사 등의 사업을 통해 소개되었지만, 지금까지도 특별한 주목을 받거나 별다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이다. 이는 고문헌을 소재로 활용할 때 발생하는 여러 가지 제약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고문서는 한문과 이두 및 초서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아서 비전 문가의 접근이 매우 어렵고, 고서는 서명과 권차 및 저자 정보를 넘어 활용 가능한 전문적인 정리목록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연구를 단초로 향후 자료의 재정리, 재촬영, 원문 자료의 탈초와 번역 등 자료의 가공과 웹 구축을 통해 관련 연구자의 관심 및 활용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사곡마을과 진양하씨를 둘러싼 인물사, 사상사, 경제사 및 지역사 등 다양하고 깊이 있는 연구들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진주 士谷 마을이 갖는 人文空間으로서의 성격을 時間과 空間 그리고 人間의 역할 속에서 분석한 것이다. 사곡은 일차적으로 晉陽河氏의 세거지로 정의할 수 있지만 그 공간의 기능성은 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곡은 大覺書院이라는 人文景觀의 확보를 통해 南 冥學 副心地로서의 正體를 확립했고, 여기에 ‘忠·孝·學’의 유교적 가치 를 입혀 공간적 秀越性을 강화했다. 사곡마을 사람들은 ‘鄕人’이었지만 그들의 사귐의 대상과 방향은 서울과 都會文化의 수용이었고, 그 바탕에는 婚脈이라는 지식문화적 流 通網이 작동하고 있었다. 사곡마을 하씨들이 17세기 이후 晉州 鄕村社 會에서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동력도 여기에 있었다. 조선의 마을은 그 시대가 선호하는 가치에 따라 디자인되는 속성을 지닌다. 사곡마을은 朱子學의 핵심 가치였던 忠·孝·學을 융합시켜 자신들의 마을을 브랜드화 했고, 이것은 사곡이 조선의 名村을 넘어 한국의 인문공간으로 주목되는 이유가 되었다. 시간 및 공간과 유리된 인간의 역할과 활동에 대한 탐색은 그 목표의 불분명성에 봉착할 수 있다. 이 글은 인간을 다루되 시간에 유념하고 공간에 집착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마을은 인간의 활동을 가장 적나라하게 포착할 수 있는 공간이고, 사회와 국가라는 보다 확대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활동을 정치하게 추출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의 연구가 매우 긴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