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이‘금사자(황금으로 만 든 사자)’를 비유로 삼아 연기사상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설명 했다. 설명하는 방법은『화엄금사자장』을 번역하고 소개함과 동시에 화엄에서 바라보는‘법계연기사상’에 대하여 해설했다. 이 과정에서 『화엄법계관문』의 관계를 설명하며‘사사무애법계관’을 인용하여 연 기사상에 대한 설명을 부연하였다. 더불어 필자는 여러 저술 속에서 바탕으로 한‘법성철학’이라는 신(新)개념을 주장, 논증했다. ‘법성철학’의 신(新)개념체계는『대승기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대승기신론』일심(一心)의 본질, 그중 진여적(眞如的) 속성은‘묘유 (妙有)’하고 진공(眞空)하다. 법성은‘진공이면서도 묘한 방식으로 존 재하는 것’이다. 『화엄금사자장』은 모두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0장들은 서로 병렬관계를 가진다. 금의 바탕을 변하지 않는‘진여(참 마음)’라고 보 고, 사자의 형상을‘인’과‘연’이 만나 생기고 사라지는‘생멸’의 상 태로 본다. 이런 수많은‘연’들은 쉼 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연기로 영원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공’을 알아야 하 고, ‘색’을 떠나‘공’이 별도로 실재한다 생각해서도 안 된다. 또한 금사자는 황금만을 노리는 도둑에게는 (사자의 형상은 없이)오로지 금으로만 보이고, 조각가 등 예술가에게는 (순금이 없이)오로지 사자 의 형상에만 쏠린다. 어디에 눈을 파는가에 따라‘드러나고’,‘ 숨고’ 를 하며 중중 무진으로 연기한다. ‘숨고’‘드러나는’본질적구조로인해서,‘ 진여’가움직이면, 그에 수반하여‘무명’도 따라서 움직인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마음의 작 용’속에는‘진(眞)’과‘망(妄)’이 혼융되어 있다. 결국은‘무명’쉬어 야하는데,‘ 무명’쉬게하려는것도역시‘마음의작용’이다. 결국은 ‘무념(無念)’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척의 이사부 축제는 지역적 연고가 있던 이사부라는 역사인물을 현대의 축제의 소재로 활용함으로써 대내적으로는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임을 부각시켰으며, 대외적으로는 독도를 비롯한 영토수호의 역사인물임을 드러냄으로써 범지역적 축제로 확산시키는 효과를 창출해 내었다. 이 연구의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첫째, 우륵의 12기에 나타난 사자연행과 이사부의 목사자 전투는 진흥왕 이전 신라사회에 사자문화의 유입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신라의 통용된 사자연행예술은 전쟁에서 강력한 무기로 존재했다. 따라서 이사부가 우산국 정벌에서 사용한 목사자는 당대에 신라에 유통된 외래문화였으며, 이후 사자는 여러 연행예술로 발전된 것이다. 둘째,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에서는 사자탈과 같은 이동형 목각양식이 이용되었다. 이것은 이사부의 해군부대가 우산국 전투에서 목사자의 전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 접근하여야 했기 때문에, 고정형 목각양식으로는 우산국 사람들을 속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사부의 목사자는 고정형 목각양식이 아니라, 탈과 같은 이동형 목각양식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이사부는 삼척 강릉지방의 지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과거 강릉단오제에 모셔졌을 뿐만 아니라 현재 삼척 오분동 마을에서도 모셔지고 있다. 이렇듯 1500년 전 역사인물 이사부는 지금까지 삼척 지역에서 신격화 되어 숭앙받는 역사적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이사부 축제는 삼척 지역의 지역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축제의 이념적기반 위에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삼척시는 이사부 축제를 국가의 외교문제와 연관시킴으로써 국가와 연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하였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울릉도를 생활권으로 하고 있는 독도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2005년 일본의 다케시마(독도)의 날 재정으로 고조된 한일 외교문제와 연관된다. 따라서 삼척시는 축제에서 이사부의 소재를 독도 및 해양에 확장시킴으로써 축제향유 계층을 국민으로 확장시켰으며, 더불어 국가차원의 지원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축제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삼척시의 이사부 축제는 기존의 지역 역사인물을 발굴하여 연결시킨 결과물이다. 이 과정에서 투영된 자치단체의 축제화는 이사부를 포장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취지 아래 다양한 국가사업과 연계함으로써 지역의 문화기반을 마련하게 된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다.
‘백수의 왕’으로 알려진 사자는 아프리카 유럽 서아시아 인도 등지의 열대 초원지대에 서식하는 무서운 동물이다. 사자는 각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자주 등장하여 그 신성함과 절대적인 힘, 그리고 위엄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사자는 서식하지 않으나 역사기록을 통해 삼국시대부터 사자의 존재를 이미 인식하고 있었으며 사자는 불법(佛法)을 지키기 위한 수호 신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통일신라 이후는 사자가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나타나며, 탑의 장식품이나 불교공예품, 그리고 기와 및 생활용품 등으로 폭넓게 수용되어 사자의 장엄함과 다양함을 볼 수 있다. 특히 단단한 화강암을 소재로 한 석사 자상이 석탑과 석등 등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다른 나라에는 독특한 예이다. 이사부는 나무인형 사자를 많이 만들어 배에 싣고 가 우산국 사람들을 나무인형 사자로 위협해서 복속시켰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이사부가 그 당시에 일반인들에게는 처음 알려졌거나 거의 알려지지 않는 무섭고 기이한 사자를 이용했다. 이사부는 이미 한번 마희로서 가야를 정복한 군사전략가이며 지략가였고, 역사가였다. 진정한 싸움에 승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이사부는 나무인형 사자를 통해 싸우지 않고 우산국을 복속시킨 것이다. 이사부의 식견과 능력으로 그는 이미 그 당시에 사자에 대한 형상과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새롭게 등장한 존재로 엄청난 힘과 무서운 외형을 가진 백수의 왕이자 불교의 호법신인 사자를 전장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우산국 복속 때 군사전략으로 이용했다. 그렇다면 이사부가 만든 나무인형 사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첫 번째 사자를 만든 재료가 나무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두 번째 나무인형 사자의 크기는 얼마였을까? 나무인형 사자를 여러 마리 만들어 배에 나누어 싣고 갔다는 기록으로 보아 트로이 목마처럼 그렇게 큰 나무인형 사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사부가 나무인형 사자를 만든 지 122년 후 가장 가까운 시기에 만들어진 분황사 모전석탑 석사자(石獅子)에 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사자상과 비교하여 비슷했거나 위협하기 위해 좀더 과장되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세 번째 나무인형 사자의 외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무인형 사자의 외형적 모습도 석사자들의 외형적 모습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본 뱀은 못 그려도 안 본 용을 그린다“는 우리 속담처럼 그 당시 실제 살아있는 사자를 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사자는 일정한 틀을 지닌 모습으로 정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사부의 나무인형 사자는 아마 그 이후에 만들어지는 신라 사자상의 전범(典範) 또는 전형(典型)이 되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한국 동물상의 대부분은 앞다리를 세우고 뒷다리는 구부린 반좌(半座)의 형태이다.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를 비롯한 일본인 4명은 1905년 6월 3일 ‘죽도어렵해려 합자회사’(竹島漁獵海驢合資會社) 정관을 작성하였다. 그런데 나카이는 회사에 참여한 사원 중 자본금 등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독도 어업 활동이 실패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죽도어렵해려합자회사’에 참여한 사원들을 비난하면서 독도 어업의 실패가 자신이 아닌 동료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카이는 오사카와 홋카이도로 강치 판매의 활로까지 준비하였다. 나카이(中井養三郞)는 창업 이후 회사의 이익이 희생당했다고 주장하였다. 나카이는 정박 관련 시설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선착장 건설이 최대의 급선무라고 파악하였다. 그는 물의 채취 방안에 고민하였다. 그는 강치 포획을 위해서 섬의 한복판을 뚫을 계획까지 만들어서, 강치어업을 위해서 독도의 자연을 심하게 훼손할 계획을 세웠다. 나카이는 ‘죽 도’의 이익 원천을 영구히 보전하려 한다면 반드시 강치의 포획 및 수산물 채취를 절제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독도 어업권의 독점을 추구하였다.
1906년 6월 죽도경영에 관한 진정서와 계획서를 제출한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 등은 ‘죽도어업조합’(竹島漁業組合)을 창립하였다. 그 후 나카이는 1907년 오키도청을 통해서 사할린의 강치(海馬)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강치의 홋카이도 판로를 확보하는 한편 사할린의 강치(海馬) 포획을 준비할 수 있었다. 나카이(中井養三郞)는 독도에 거주하지 않았고, 어업 활동을 한정된 시기만 전개하였다. 나카이의 ‘죽도어업조합’은 독도에 거주와 주소지가 없기 때문에 일본의 어업조합규칙을 위반하였다.
‘죽도어렵해려합자회사’는 시마네현의 특혜에 따른 나카이의 독점적 영업활동이 진행 되면서 함께 참여한 조합원의 반발과 탈퇴라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더구나 나카이는 강치의 번식과 보호를 위해서 노력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나카이는 경제적 이익을 올리기 위해서 강치를 남획하였다. 나카이는 독도에 거주하지 않으면서 일본 어업법까지 어겨가 면서 ‘죽도어렵해려합자회사’와 ‘죽도어업조합’을 조직하였고, 만 마리 이상이 생존했던 독도의 강치를 불법적으로 남획하여 독도의 생태환경까지 파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