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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영국에서 활동한 미국인 인상파 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작품과 그가 디자인한 <공작의 방>에 구현된 19세기 중 반 이후 영국사회의 중국 청화백자 수집 열광 현상인 ‘차이나매니아(Chinamania)’에 관해 고찰한 것이다. 17, 18세기 중 국 청화백자에서 자신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발견한 휘슬러에 의해 촉발된 1860년대 영국에서의 차이나매니아 현상 은 <공작의 방>이 완성된 187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부르주아 계층의 주요 소장가 그룹을 중심으로 점차 영국 상류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갔다. 1878년 휘슬러에 의해 완성된 <공작의 방>은 19세기 중반 이후 영국사회에서 유행한 중국 청화백 자 소장 문화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휘슬러의 17, 18세기 중국 청화백자를 소재로 한 회화 작품과 그가 구성 한 <공작의 방>의 제작 과정을 분석하는 연구는 1860년대 이후 영국 상류사회에서 새롭게 등장한 중국 도자기에 대한 미적 취향과 소장 문화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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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석정 한익환은 1970년 중반 혜곡 최순우의 감식안에 힘입어 전승도자 계승자로서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다. 그에게는 항상 전승도자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지만 그는 전승을 위해 연구를 거듭한 요업공학자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그는 일반적으로 도예가들이 행하는 기형의 연구 보다는 흙의 실험을 통한 도자기 색의 연구에 더 집중하였다. 1940년대 부터 도자기 기술의 바탕이 되는 공부를 시작한 석정 한익환은 1950년 강원도 홍천의 전통가마에 파견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전통자기의 제작 기법을 배웠고 그 후 현대도자기 공장의 연구실에서 도자기 색을 만들 어내는 조합사의 길을 걸었다. 최고의 색깔 조합사로 이름을 날리면서 전통도자기 제작을 위해 독립적인 가마를 운영하였으나 결혼과 함께 잠 시 중단하였다. 그러나 전통 도자기 제작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결 국 1960년대 후반에 산곡요를 만들었다. 이 시절부터 그는 백토를 찾아 전국을 찾아다니기 시작하였고 1975년 백토 광산이 있는 경기도 용인의 고안리로 가마를 이전하고 ‘익요’시기를 맞이하였다. 이시기에 그는 조 선백자의 백색 연구를 완성하면서 ‘앞으로 기술이 발달하여 나의 백자 를 모방할 수는 있어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고까지 말하면서 최고의 백 색을 가진 백자로 발전시켰다. 특히 1981년부터는 신세계백화점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재현과 답습 에서 벗어나 더 좋은 백자색을 만들어 보라’고 한 최순우 관장의 말에 의해 전통 방식의 도자 기술과 현대식 도자 실험을 통한 색의 개발에 몰두하였다. 전승도자를 현대화, 대중화하는 연구를 시작하면서 한익환 백자는 대부분 순백자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전문가들과 일반인들이 선호하는 한 익환 백자는 오히려 조선 백자의 색을 전승한 백색을 완성한 후 그가 만들어낸 백색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의 백색은 한익환이 만든 태토의 백색에서 나오는 색을 기본으로 유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나타난다. 한익환의 백자는 수입이나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태토가 아 니라 옛 선조들이 사용하였던 한국의 흙을 기본으로 계승 발전시켜 조 선관요백자 색을 넘어선 백자이다. 그가 전승도자의 현대화를 연구하면서 입버릇처럼 ‘반광택’이라고 주 장하던 것은 그에게 있어서 옛 도자를 전승하는데 필수 조건이었다. 우리 눈앞에 놓여있는 전통 도자색은 광택이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바다 속 뻘에서 나온 청자의 경우 새로 만든 청자처럼 광택이 난다. 이는 진공 상태의 도자의 경우 옛 도자라고 하여도 한익환이 말하는 정도의 반광택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익환이 말하는 반광택은 세월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전통 자기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전통 도자의 ‘계승’은 완벽한 색의 ‘재현’이므로 그는 자신의 도자에 세월의 흔적까지 나타내려 했던 전승 장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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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우리 도자의 역사에서 고려시대 청자의 대표를 梅甁이라 한다면 조 선시대 백자는 龍樽이라 할 수 있다. 청화로 그린 용준은 조선의 개국 이후 체제가 정비되고 儀禮와 관련 器皿制式이 정립되는 첫 단계부터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기본 골격을 준수하면서 시종일관 하였다. 따라서 청화용준을 조선백자의 상징이며 중심적 존재라고 하는 데 이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간에 연구 경향은 17세기에 청화재료 수급이 어려워지면서假畵와 鐵畵재료인 石間硃를 썼고 또 그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 되었 다는 전제 아래 ‘철화백자의 시대’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결국 이러한 입장을 취함으로서 조선백자의 근간으로 조형의 중심을 이끌며 일정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온 청화용준이 일백년 가까이 단절되었고 다시 18세기에 새롭게 구성한 조형체계로 재등장 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러한 인식은 조선 중, 후기 백자의 전개에서 조형정신의 계승은 물론 조선사회 를 구성하는 지적 엘리트들의 일정한 美意識을 규명하는데 심각한 장 애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임진란 이후 광해군11년(1619)에 와서 어렵게 청화를 구하여 용준 제작이 가능해졌고 이후 왕실의 雙龍樽제작은 19세기까지 지속 되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존하는 조선중기, 후기 청화백자 쌍용준의 조형적 특징을 기준으로 여섯 유형으로 나누고 각각 의 성격을 분석했으며, 여기서 分院窯址出土철화용준의 절대편년 자 료를 대입하여 분류 기준의 당위성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철화백자는 사용주체도 달랐고 명분도 분명히 달랐다. 철화는 청화와 함께 상하관계를 유지하며 동일한 시공간에서 각각 다른 조 형의장을 계승하면서 일정기간 동안 공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적 인 계급사회의 정착을 추구했던 조선의 司饔院分院에서 정통성을 갖 는 청화백자와는 전혀 다른 위치와 기능으로 17세기 동안 독자적 철화 백자의 조형체계를 확립했고 곧 이어 간소화 쇠퇴하면서 지방 民窯로 이전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조선시대 백자의 대표격인 용준의 조형체계를 밝히는 일은 조선백자 의 근간을 밝히는 근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다. 조선 전 기에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던 樽은 17세기 전기를 지나면서 한 가지로 통합 되는데 그 과정에서 청화백자 쌍용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 다. 제작 주체였던 사대부들의 관심이 제왕의 쌍용준에 있었을 가능성 이 높기 때문이다. 士大夫들은 이 용준에 용 그림 대신 四君子와 花鳥, 山水, 人物, 魚 蟹, 十長生등 새로운 그림들을 敎化와 祈福의 기능을 존중하면서 그려 넣었다. 따라서 용 그림 주변에서 莊嚴을 상징했던 당초, 여의두, 劍形 蓮瓣같은 종속문양대를 생략하거나 단순화하는 것이 신하로서 사대부 가 지켜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조선후기 上品畵樽가운데 검형연판문대를 갖춘 예가 박병래선생 기증품 <白磁靑畵山水文樽>(높 이 38.1) 한 점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러한 제작 분위기를 설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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