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한성기 왕성으로 비정되고 있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성벽 축조기법에 대하여 살 펴보았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서로 다른 지형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성벽 축조기법에서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지면 지정과 기초성토에 의한 기저부 조성방식 등에서는 축조기 법의 공통점도 확인된다. 江岸 평지에 축조된 풍납토성은 자연제방의 구지표면을 정지하고 기초성토를 한 후 그 위에 판축틀(거푸집)을 설치하여 版塊를 축조하는 방식인 판축기법으로 축조하였다. 성벽의 구조는 중심토루와 중심토루의 내·외벽면에 덧붙여진 토루로 이루어졌으며, 판괴를 순차 적으로 덧붙여가며 축조하는 分段法에 의해 성벽이 완성되었다. 반면, 구릉과 평지가 복합 된 지형에 축조된 몽촌토성은 지형에 따라 축조기법의 차이가 엿보인다. 성벽 축조구간이 평지인 경우는 풍납토성과 같은 판축기법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구릉 지 역의 경우는 구릉의 자연 경사면을 2~3단의 계단상으로 깎아내고 그 위에 성벽을 축조하 였는데, 구간에 따라 다소 축조기법의 차이가 확인된다. 즉, 북서벽 구간은 판축틀을 설치 하여 축조한 양상이 확인되었고, 동벽 구간의 경우는 성토기법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판단 된다. 이렇듯 성의 입지에 따른 두 성의 축조기법상의 차이가 있지만, 축조기법상의 공통점도 확인된다. 즉, 지면과 성벽의 유동성을 억제하기 위해 성벽 기초부의 내측 혹은 외측에 해당 하는 부분의 지면을 얕게 굴착하여 끝부분이 돌출되게 지면을 지정하는 기법, 성벽 기초부 에 뻘 혹은 점질토를 이용하여 기초성토를 하는 방식, 기저부 보강 방법의 일환으로 토제를 시설한 것 등은 두 성에서 모두 확인되는 축조기법이다.
충북지역 백제 초기 산성은 충북지역에 존재했던 마한 사회가 백제 중앙의 지배체제 속에 편입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한다.충북지역 백제 초기 산성의 유형은 산성의 입지, 형태, 규모 등에 따라 5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5가지 유형 중 가장 많은 유형은 比高가 100m 이상의 높이에 위치하며, 성의 둘레가 250~500m 내외의 테뫼식 유형에 속하는 山頂式 혹은 馬鞍形의 토축 산성이다충북지역 백제 초기 산성의 특징은 3가지 점이 확인된다. 첫째는 산성을 일부 혹은 전체를 감싸듯이 조성된 外環道 모양의 성외 평탄부가 대부분 확인되고 있다. 두 번째로는 마안형에 속하는 산성은 성안에 望臺와 같은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高臺가 일반적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흙을 다져 올려 축조한 토축산성은 성벽 외측에 土堤를 만들고 토제의 내측에 잇대어 흙을 성토다짐한 축조기법이 확인된다.
이성산성은 남성과 북성 2개의 성으로 이루어진 백제 한성기 토축산성이다. 이성산성에 대한 4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출토된 토기류는 원삼국기~백제 한성기에 해당하는 토기들로 미호천유역 원삼국기 이래의 재지적 요소를 갖고 있는 토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중심시기는 4세기 대에 해당하고 있다. 이성산성의 축조는 백제가 미호천유역의 정치세력을 병합한 직후인 4세기 중~후엽경에 백제 중앙의 주도하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 시기는 토기양상을 통해 볼 때, 남성(南城)이 북성(北城)보다 다소 이른 4세기 중엽, 그리고 북성이 4세기 후엽경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산성 토기류에는 재지계 및 한성백제 토기외에 가야(김해)지역, 충남 서해안 및 영산강유역의 토기기종으로 판단되는 외래기종 토기류가 출토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들 외래기종 토기류는 대체로 4세기 후엽의 시기에 집중되고 있는데, 가야와 영산강유역권과의 교류상을 엿볼 수 있는 유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성산성은 백제 한성기 가야(김해) 및 영산강유역으로 연결되는 교류루트상의 중간지역에 위치한 지방 거점성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글은 청주 부모산성과 부모산성 제 1보루, 학천산성에서 출토된 토기를 분석하여 이들 城堡의 축조 시기 및 주체, 그리고 변천상을 살펴본 글이다. 부모산성은 삼국시대 삼국의 국경지역인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거점성이다. 그리고 부모산성과 연결된 주변 능선의 봉우리에는 작은 방어시설인 보루를 갖추고 있어 本城과 堡壘가 결합된 방어체계를 띠고 있다. 부모산성 및 주변 성보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토기는 백제토기와 신라토기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외에 소수의 고구려계 토기편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토기양상은 부모산성이 위치한 청주지역이 삼국의 주요 쟁패지역이었으며, 특히 부모산성의 축조 및 경영 주체가 백제와 신라에 의해 변천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부모산성은 처음에 백제에 의해 부모산 정상을 중심으로 방어시설이 구축되어 한성기~웅진기 초까지 사용되다가 6세기 후반 신라가 청주지역에 진출하면서 신라에 의해 현재의 석축산성이 축조되어 7세기 전반까지 경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백제 사비기에 백제가 신라로부터 재 탈환하여 일정시기 동안 백제의 서쪽변경을 지키는 중요한 거점성으로서 활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모산성 제1보루는 백제 한성기~웅진기 초까지 木柵혹은 土壘로 이루어진 백제의 중요 關防施設로 경영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부모산성이 신라에 의해 경영된 시기에는 신라에 의해 활용되다가 백제 사비기에 백제에 의해 다시 경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끝으로 학천산성은 백제 사비기 토기가 주를 이루고 있고, 성벽의 구조 및 축조방법이 부여나성과 유사한 점 등을 통해 볼 때 백제 사비기에 백제에 의해 축조ㆍ경영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