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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3

        1.
        2010.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1. 陶淵明의 <歸去來辭>는 不正과 腐敗, 爭鬪와 非理로 얼룩진 晉․宋年間에 그 자신의 田園에 대한 憧憬과 자기 본연의 모습을 실현에 옮긴 작품으로써 漢代에 성행했던 賦라는 형식의 작품이다. 漢代의 賦는 대체로 호화롭고 거창한 사물들을 아름다운 형식으로 멋지게 표현하는 데에만 힘써서, 결국 생명이 없는 貴族文學으로 변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도연명의 <歸去來辭>는 漢代의 賦와는 달리 언어가 平易하고, 꾸밈이나 다듬은 바가 없으며, 가슴속의 奧妙한 意趣를 읊었기에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인간의 ‘참성정’ ‘참생명’을 반영한 작품이다. 2. 蘇東坡의 <和歸去來辭>는 그가 海南에서 貶謫생활을 할 때 지은 작품으로 形式上으로는 陶淵明 <歸去來辭>의 題目과 韻字를 빌린 것으로 나타났지만, 實際上에서는 陶淵明의 <歸去來辭>를 體得한 후, 그가 전원으로 貶謫된 상황에서 哲理的인 인생관을 읊은 敍事이며, <歸去來辭>를 追和하면서 주관적인 감상과 豪放한 詩心을 읊은 抒情이다. 그 내용은 전원생활의 平淡한 自然情趣를 표현했던 <歸去來辭>와 달리 安分隨命하려는 자신의 심경을 묘사하였다. 3. 兩人의 작품에 나타난 제 1문단을 비교하면, 도연명의 <歸去來辭>는 전원으로 돌아가는데, 平易한 언어의 표현으로 내용이 순탄하게 전개되어 쾌활한 느낌을 주며, 그의 은퇴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나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라는 儒家的 隱遁의 方式을 취하였으나, 소동파는 昌化에 貶謫되어 자신의 身世에 대한 서글픔을 읊으면서 《莊子》에 나오는 “無何有之鄕”을 憧憬하였다. 兩辭의 韻字는 모두 “微”字韻으로 押韻하였다. 4. 兩人의 제2문단을 비교하면, 도연명은 그가 自意에 의해 전원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자상하고 순서 있게 표현하여서 독자로 하여금 그와 더불어 전원으로 인도되어 自然과 더불어 영원한 삶을 누리고 싶은 심정을 느끼게 한다. 소동파 역시 연명과 같은 詩脈을 가지고 田園歸居의 모습을 표현하여서 詩想의 일치함을 알 수 있다. 兩辭의 韻字는 모두 “寒”字韻으로 일치한다. 5. 兩人의 제3문단을 비교하면, 도연명은 속된 세상의 사귐을 떠나 전원에 돌아와 安着하여 樂琴書와 농사일을 하면서 산수자연의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심정을 儒家的인 생활방식으로 읊어 詩語의 흐름이 생동감이 있고 희망참을 느끼게 하고, 소동파는 佛經과 莊子의 사상에 가까운 내용으로 ‘無何有之鄕’에 안주하고자 함을 읊어 시어의 흐름이 엄숙하고 오묘함을 느끼게 한다. 兩辭의 韻字는 모두 “尤”字韻으로 押韻하였다. 6. 제4문단은 兩 작품의 결론에 해당하는 문단으로 도연명은 人間事를 自然의 推移에 따라 맡기고 安貧樂道하며 達觀된 태도로 天命을 기다린다고 읊었고, 소동파는 永生不滅이나 神仙思想에는 懷疑를 느끼기에 도연명을 스승 삼아 그의 後身이 되고자 한다고 읊었다. 兩辭의 韻字는 모두 “支”字韻으로 押韻하였다. 이상으로 소동파의 <和歸去來辭>를 分析․比較한 결과 그의 <和歸去來辭>는 莊子의 ‘無何有之鄕’에 안주하여 桃源에 대한 憧憬은 있으나, 陶淵明의 <歸去來辭>와 비추어 볼 때 實感이 결여되어 意趣에는 미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도연명의 <歸去來辭>는 위대한 작가의 문학작품으로서 후세의 영원한 龜鑑이 되고, 교훈의 지침서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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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松江이 활동하던 시대는 倭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의 난리가 있었고, 조정에서는 黨爭으로 인한 정치적 다툼으로 인해 정치 ․ 사회적으로 혼란이 극심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西人의 우두머리로서 정치에 몸담았던 송강은 黨派로 인한 답답한 심정과 謫所生活에서 겪는 고민을 해소하고자 도연명이 자연을 벗 삼아 참신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던 田園閑居 생활을 흠모하고, 그의 영향을 받아 自然憧憬의 시를 읊었다. 송강은 도연명처럼 자의적으로 歸去來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타의에 의한 謫所生活에서 出仕에 대한 의욕을 잃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임금의 은혜로 謫所에서 풀려나 정계에 복귀되어 좌의정이라는 높은 벼슬에까지 오른 것은 도연명이 자의적으로 전원에 歸去來한 후 다시는 조정에서 불러도 정치에 뜻을 두지 않은 出處觀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임금에 충성하고 經世濟民에 뜻을 두었던 16세기 조선 士林들의 出處觀과 송강도 같이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편 도연명은 政治道義가 상실되어 不義한 방법으로 신하에 의해 왕위가 찬탈되어 晉에서 宋으로 나라가 바뀌자󰡒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물러나 숨는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와 󰡒달통하면 나서서 천하를 구제하고,막히면 할 수 없이 물러나 자신을 착하게 한다.(達則兼善天下,窮則獨善其身.)라는 儒家의 관념에 出處觀을 두었고, 송강은 맹자가 말한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 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生, 亦我所欲也. 義,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에 出處觀을 두어 經世濟民하고자 끝까지 벼슬에 대한 집착을 하였다. 이를 보면 兩人의 出處는 儒家의 가치관에 의해 정했다는 것이 相似點으로 나타났다. 松江은 당시 黨爭으로 인한 정치 현실에서 고뇌를 해소하고, 謫所생활에서의 위안을 얻는 데는 술만큼 좋은 媒介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도연명이 憂愁를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는 점과 일치한다. 도연명은 비록 다섯 편의 시에서 짧은 시구로 국화사랑의 시를 표현하였으나, 周濂溪가 그의〈愛蓮說〉에서 󰡒국화는 꽃의 은일자다.(菊, 花之隱逸者也.)󰡓라 말하고, 󰡒晉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다. (晉陶淵明獨愛菊)󰡓라고 말하여 도연명의 국화사랑을 특별히 부각시킨 이후 송강도 󰡐菊花󰡑하면 도연명이 동쪽 울타리 밑에 심었던󰡐黃菊󰡑을 연상하였고, 국화를 통해 名利로부터 탈속하여 선비로서의 고결한 자태를 보여준 도연명을 국화사랑의 대표자로 생각하며 존경과 흠모하는 시를 읊었다. 田園은 생명의 근원이 샘솟고, 자연의 숨결과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며, 순박하고 다정다감한 정서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에게 勤勉과 休息을 주는 최후의 安息處이기도 하다. 도연명은 일반 전원시인들과는 달리 그의 시에서 田園에 대한 讚美와 함께 몸소 전원에서 躬耕한 체험을 바탕으로 田園의 생명력이 솟구치는 활기찬 정경을 읊어 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에 松江도 도연명이 읊은 시구와 典故를 援用하여 도연명의 田園閑居에 대한 동경의 시를 지었다. 陶淵明이 만년에 쓴 〈桃花源詩幷記〉는 晋 ․ 宋年間에 민중들이 정치의 災禍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이상사회를 추구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人口에 膾炙되어 왔다. 이 작품은 간결한 언어와 뛰어난 造語力으로 순박하고 화목한 농촌사회를 이상세계로 삼아 老子의 ‘小國寡民’ 이나 儒家의 ‘大同世界’ 이념을 잘 형상화하여 혼란시대에 처한 인간들의 간절한 희망을 반영시켰다. 도연명의 이상향인 桃源世界는 신선이 사는 세계가 아니라 포악한 秦의 난리를 피해 漢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 그 뒤로 魏나라 晉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면서 조상에 제사지내고, 손님에게 닭을 잡아 술을 대접하는 다정다감한 情感과 불 때서 밥해 먹는 인간사회의 정황을 묘사하였기에 松江도 도연명이 묘사한 儒家的 관념의 桃源世界를 갈망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운명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도연명은 죽음으로부터 해탈하고자 不老長生을 추구하는 道家나 靈魂不滅의 佛家에도 관심을 가져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宿命的인 죽음을 해결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은 그는 儒家的인 自然歸依觀에 최후의 몸을 맡겼듯이 송강도 도연명처럼 儒家的 삶의 방식을 추구하다가 그의 생을 마쳤다. 결국 兩人은 1200년 가까운 시대적 차이와 각기 다른 국가에서 다른 정치 ․ 사회의 풍파를 겪으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갔지만, 兩人의 자연사랑과 은일관념은 儒家的 관념으로 불후의 전원시가 문학을 창작한 것이 일치하며, 兩人의 문학세계는 후대 시가 문학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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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聾巖(李賢輔)作爲活動在四大士禍與黨爭以及中宗反正政變的政治社會不安定時期的政治家與文人, 深深陶醉于陶淵明的歸去來思想. 因此對於官職他生活在愛戀與歸去來之間的矛盾中, 在故鄕建立了明農堂, 並繪歸去來圖, 憧憬著陶淵明的歸去來, 在他76歲的晚年實現了歸去來的願望. 聾巖作爲朝鮮江湖歌道的創始者, 他的愛好自然思想對退溪的《陶山十二曲》, 粟谷的《高山九曲歌》, 孤山的《山中新曲》, 松江的長短歌, 蘆溪歌辭, 曹植的《南冥歌》, 宋寅的《水月亭歌》, 宋純的《俯仰亭歌》等有巨大的影響. 朝鮮江湖歌道的詩歌創作者們所具有的歸去來思想主要體現在由於黨爭而在他人的規律下的外在情況下形成的“黨爭之下明哲保身”, 然而李賢輔在政治上也悠然自得如在世俗之外一般憧憬歸去來, 在其詩歌的情緒表現上體現出“致仕客的閒適”. 聾巖居於江湖自然中, 當時的時代精神是將自然的法則與人間的道理融合爲一的性理學, 他以力圖自然貼近於這種時代精神的意志, 通過歸去來表現出來, 爲官時以作漢文詩爲主, 歸隱之後以韓國語的時調表現自身情緒, 可以說對國文詩歌文學傳統的基礎具有重大的意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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