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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243

        242.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주지하다시피 남명 몰후 인조반정 이전까지 약 50년 동안은 남명학파가 역사 의 전면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시기라 할 수 있거니와, 인조반정으로 인 해 남명학파를 이끌던 내암 정인홍이 적신으로 몰려 처형된 뒤로부터 남명학파 는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북인이었던 남명학파가 인조반정 이후 󰡔남명집󰡕에 실린 정인홍의 흔적을 없애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부류와 소극적인 부류가 대립하면서 남인과 서인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이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남인은 퇴계학파화하고 서인은 율곡학파화하였다. 그러나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江右 지역의 인물 가운데 남인화 또는 서인화한 두드러진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남명 학파의 학문정신을 나름대로 계승해 왔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리고 이러한 지역적 분위기는 남인화 또는 서인화한 인물의 경우도 남명학파의 학문정신을 근본적으로 배제한 채 퇴계학파 또는 율곡학파의 학문을 수용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영조 4년(서기 1728년)에 일어난 무신사태 때 강우 지역에서 동계 정온의 현 손 정희량과 도촌 조응인의 5대손 조성좌가 세력을 규합하여 안의․거창․합천․삼 가를 한 때 점령했던 일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해 강우 지역은 반역향이라는 인식이 심화되었으며, 이 지역의 선비들도 그 기상이 저하되고 남명학파로서의 학문정신에 대한 자긍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면 학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16-17세기의 학 문적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하였다. 당시 강우지역의 학자들의 남명학 계승양상 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우선, 조선말기에 이르기까지 경상우도 지역에서는 그들이 비록 영남 남인 정 재 유치명의 문인이거나 기호남인 성재 허전의 문인이거나 호남 노론 노사 기 정진의 문인이거나 간에 남명의 경의 사상에 대한 계승의 의지가 확고함을 알 수 있다. 특히 퇴계를 경모하면서 한주의 주리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후산 허유가, 남명의 신명사도와 신명사명에 대한 정밀한 주해를 하면서 경상우도의 당대 선후배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여 완성시켰던 점은 남명 사상의 근저를 확고히 하려는 의식의 소산이었다. 출처관 또한 남명의 영향이 당시까지 깊이 남아 있었다. 만성・단계・후산・노 백헌・물천・면우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었음에도 과거로 발신한 사람은 단계 김인섭 뿐이다. 그런데 그 단계가 조정에서 물러난 뒤 수령들의 횡포가 극에 달 한 것을 보고 그 아버지와 함께 민란을 주도한 것은, 남명의 출처관과 현실비판 의 정신이 변모된 양상으로 후대에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남명이 남긴 시황계의 영향은 조선말기에 이르면 상당히 퇴색해지고, 성리학 이론에 관한 탐구를 배격하였던 남명의 정신도 많이 허물어졌다. 그러나 남명의 경의 사상과 출처관 등은 조선말기까지도 확고하고, 실천을 중 시하는 학풍 또한 깊이 젖어 있어서 성리설에 대한 학설 전개를 못마땅해 하는 분위기가 1900년 무렵에도 광범위하게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겉으 로 드러난 학맥상으로 보면 남명학파가 와해되어 사라진 듯하여도 실상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인 것이다.
        243.
        200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조선의 경학사에 일획을 그은 君王인 정조와 신하인 정약용의 학문적 만남을 詩經講義라는 텍스트를 통하여 조망한 논문이다. 이들의 만남에 주목하는 이유는 통상의 經筵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군왕이 자신의 의도로 선택한 인재와 질의응답을 통하여 새로운 경학의 세계를 확장하는 보기 드문 케이스이다. 우선 전통적 帝王敎育의 유형으로 정도전 · 권근 · 이황 · 이율곡 등의 사례를 들어 조선시대 경연이 추구하였던 이상적 교육상을 알아보고, 이것에 대응하는 역대 왕들의 경연 참석 상황을 살펴보았다. 정조의 캐릭터는 한마디로 말하면 好學의 學者적 君王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조의 유교적 이상정치와 현실의 실현이라는 점점에 정약용을 비롯한 초계문신이 위치한다. 초계문신 뿐 만 아니라, 정조의 정치적 학운 활동에는 학파 • 지역 · 신분 의 차를 초월하여 다양한 유자가 참여한다. 이러한 열린 학문 활동은 곧 당시 사회의 개방성에의 지향을 엿보게 함과 동시에 보편 문화의 성숙을 알려준다. 『시경강의』를 통하여 살펴본 두 사람의 기본적 경학관은 상당히 유사하다 양쪽 다 주자의 경학적 업적을 존중하지만, 논리상 부합하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는 회의와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정조는 정약용만큼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조의 개방적 경학관에 힘입어 주자를 극복하는 정약용의 독창적 견해가 빛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이러한 脫朱子의 경학관은 정조시대의 새로운 학 풍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시경강의』의 내용분석을 통하여 정치와 사회에 관한 두 사람의 견해 를 알아보았다. 특히 ‘賢人 ’에 있어서 정조가 유교의 전통적 賢人觀을 견지하고 있음에 비하여, 정약용은 어느 분야에서냐 기능이든 학문이든 할 수 있는 데까지 매진하여 어느 경지에 도달하면 그를 현인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고착화된 신분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견해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安民’의 문제에 있어서는 두 사람 모두 유사한 시각을 노정한다. 安民의 기본조건으로 治者계층의 德化를 중요시한다. 堯舜의 至治를 정치의 이상형으로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현실적 방법으로 治者는 古學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想定한다. 이러한 본고의 고찰을 통하여 정조와 정약용과 갇은 군신 간의 학문적 활동은 글자그대로 敎學相長적인 만남이며, 조선경학의 실학시대를 만개 시킨 動力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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