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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색결과 26

        21.
        2011.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국가의 영토는 ‘고유영토’(inherent territory)와 ‘취득영토’(acquired territory)로 구분된다. 전자는 국가가 국가로써 성립할 당시에 그 국가의 성립의 기초인 영토를 말하며, 후자는 국가가 국가로써 성립한 이후에 선점 할량-시효 정복 등에 의해 취득한 영토를 말한다. 국제판례는 본원적 권원(original title), 고전적 권원(ancient title), 봉건적 권원 (fend이 title) 등에 기초한 영토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고유영토’라는 용어는 사용하고 있지 아니한다. 한국정부와 일본정부도 각기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고유영토’라는 표현은 외교 문서상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독도는 한국의 고유영토인가? 아니면 독도는 한국의 취득영토인가? 한국의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독도는 신라 지증왕 13년(512년)에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하여 취득한 고유영토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명백히 자기모순적 표현이다. 이 자기모순적 표현은 한국이사부학회가 정리 해결하여야 할 과제 이다. 한국이사부학회는 이 첫째의 과제 이외에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이 합법적이냐의 둘째 과제, 우산국 정복에 의한 역사적 권원은 언제 현대국제법상 권원으로 대체되었느냐의 셋째 과제, 그리고 역사적 권원이 대체된 이후 역사적 권원은 무의미한 것으로 되었느냐의 넷째 과제를 해결하여야 할 역사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이 과제를 한국이사부학회가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정부 당국의 적극적 지원이 요청된다.
        6,300원
        22.
        2011.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사부는 왕족 출신의 신라 최고 귀족으로서 신라의 대외팽창과 국가체제 정비에 앞장 선 국가의 동량이었다. 그가 살았던 6세기 전반은 신라가 크게 융성하고 뻗어가는 시기였다. 그는 국사 편찬을 건의함으로써 내치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획을 그었고, 동해안 진출과 남해안의 가야 진출을 주도함으로써, 동남해 연안항로에 대한 주도권 확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는 이후 신라의 국가 발전에 절대적 원동력이 되었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동해안 패권을 확립한 것을 의미하고, 금관국의 복속은 김유신 가문을 영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신라의 삼국통 일이 이사부와 김유신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이사부가 성취한 해양진출의 큰 의의이다. 장보고는 섬 출신의 일개 평민 신분으로 이사부와는 신분적으로 대조적이다. 그 가 살았던 9세기 전반은 국가가 주도하는 공무역보다는 개인 능력자가 주도하는 사무역이 발전하는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장보고는 당으로 건너가 군인으로 출세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해양무역의 최고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828년에는 신라에 돌아와서 흥덕왕의 지지를 얻어내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여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주도하는 기지로 활용했다. 그는 단순한 무역업에 그치지 않고 서남해지역에 대규모 청자생산단지를 건설하여 신라를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기를 생산하는 나라가 되게 했으며, 한 중 일의 바닷길을 잇는 이른바 ‘장보고항로’를 활성화시켰다. 청자생산단지는 이후 고려청자로 이어져 전성기에 이르렀고, ‘장보고항로’는 고려시대에도 핵심 항로로 지속 발전해 갔다. 결국 이사부는 ‘원조 해양진출의 영웅’, 장보고는 ‘본격 해양진출의 영웅’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10,500원
        23.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최근에 신라장군 이사부의 동해안 출항지가 새로운 논점으로 제기되면서, 지금까지 ‘강릉출항설’과 ‘삼척출항설’이 대두되고 있다. 본 연구는 우산국을 복속한 이사부의 동해안 출항지에 대한 실체적 규명의 필요성이 시급히 요구됨에 따라, 이에 대한 해결을 모색하는 방안의 일환으로서 강원 영동지방의 강릉․동해․삼척지역으로 공간적 범위를 제한하여 역사고고유적을 바탕으로 접근해 보았다. ‘강릉출항설’에 대한 검토 결과, 안목항(지금의 강릉항)은 남대천 하구의 바깥쪽에 위치하고 암석해안으로 구성된 규모가 매우 작은 포구이기 때문에 대규모 兵 船의 출입에는 매우 부적합한 장소로 판단된다. 또한 남대천 하류역의 일대는 주변이 모두 사구지대와 저습지로 형성된 관계로 당시 하천의 정확한 고환경을 알 수 없으나 그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생각된다. ‘삼척출항설’에 대한 검토 결과, 오십천 하구와 하구 남쪽에 접한 오화리산성의 구조와 지리적 입지, 산성내 출토유물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에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진다. 대체로 삼국시대 5C ~ 7C대의 신라고분들이 군집을 이루고, 據點城 내지 治所 城이 함께 존재하고 있는 지역은 영동지방에서 비교적 큰 하천에 속하는 강릉 연곡천ㆍ남대천ㆍ군선천ㆍ주수천 일대, 동해 전천 일대, 삼척 오십천ㆍ마읍천ㆍ가곡천 (호산천 포함) 일대로 파악된다. 신라가 동해안 지역 중에서 가장 먼저 삼척에 군사적 전진기기의 성격을 띠는 州를 설치한 것은 이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주목하여, 동해 연안해로(해상교통로)를 독점적으로 확보 ․ 지배하여 동해안 영동지방의 진출과 북방교역의 전진기지로서 最適地가 바로 삼척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실직지원에서의 말갈세력 격파, 실직원에서의 고구려변장 살해, 실직성의 습격, 니하성 축성 등 일련의 기사를 통해서 泥河가 고구려와 말갈세력의 주요한 삼척 침입루트로 파악되며, 실직성 습격에 따른 니하성의 축조는 실직성(삼척)의 지정학적 중요성, 즉 해상루트와 관련된 핵심적인 전진기지로서 신라나 고구려 입장에서 모두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이해된다. 이사부 출항지 문제해결과 관련하여 필수적인 요건으로서 대규모의 신라군선이 정박할 수 있는 넓은 자연항포구와 그에 수반되는 군시시설로서 성곽의 존재성으로 파악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수군 기능과 관련하여 신라군사가 주둔했던 신라성곽들을 제시해 보았다. 그 가운데서 하천의 하구에 가장 가까이에 소재하는 오화 리산성이 입지와 규모면에서 볼 때 예국고성을 제외한 다른 산성보다도 훨씬 뛰어나고 압도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산성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단정을 내릴 수는 없지만, 삼척 오십천 하구 그리고 그에 접해 있는 오화리산성이 이사부가 우산국 정복을 위해 출항했던 당시 출항지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항포구와 유적지인 것으로 추정된다.
        14,000원
        24.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동아시아는 해양과 대륙이 만나는 접점에 있으며 우리민족이 활동한 역사활동의 터는 대륙과 한반도와 주변의 해양이 유기적으로 연관성을 지닌 곳이다.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접변지역은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였다. 동해는 남해나 황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역사의 중심부에서 멀었으며 주체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미흡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에게는 일본열도 진출의 거점으로 중요한 측면이 있었으며, 신라에게는 해양진출과 고구려에 대한 공격 및 방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했다. 신라는 소위 海陸政策을 추진하면서 동해 중부지역 및 해역의 중요성이 커졌으며, 거점도시의 육성이 불가피했다. 따라서 삼척 및 강릉지역을 중요하게 여겨 고구려를 비롯한 여러 세력들과 갈등을 벌이면서 자기 세력권하의 거점도시로 육성 하였다. 삼척지역은 본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상과 경제적 측면, 신앙 기능 등은 물론이고, 항구, 방어체제, 교통망 등의 도시구조면에서도‘海港都市’의 성격과 범주에 적합했다. 신라는 국가정책과 동아시아의 질서 속에서 우산국을 복속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데 신라군이 동해를 횡단하여 독립적인 해상왕국을 공격하 고, 승리를 거두려면 강력한 해양력과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 그리고 훈련된 수군병력이 필요하다. 그와 함께 장기간에 걸친 전쟁준비를 추진하는 능력을 갖춘 거점의 확보가 필요하고, 또한 대군이 발진하는 장소인 軍港의 선정과 활용은 절대적이다. 본고는 삼척이 해항도시 및 군항으로서 타당성이 높은가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에서 분석하였다. 그 결과 삼척은 김이사부 선단의 발진기지와 군항으로서 필요한 조건들을 갖추었으며, 동해중부지역에서는 실제 출항지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도시임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당시에 벌어진 전쟁의 중요도와 규모와 작전의 성격 등을 고려하고, 동해중부지역의 자연환경 및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삼척지역 만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오히려 삼척을 주력발진기지로 삼으면서 북쪽의 강릉지역 및 남쪽의 울진 등과 유기적인 연합체제를 갖추면서 역할분담을 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11,300원
        25.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이사부 장군은 512년에 전선에 목사자를 실은 무력의 행사 수단에 의해 울릉도 뿐만 아니라 독도로 구성된 우산국을 정복했다. 동 정복의 결과로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토주권, 즉 독도에 대한 한국의 역사적 권원이 512년에 확립되게 되었다. 고대법상 정복은 영토취득의 수단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고대법이 국가에게 정복에 의한 영토취득을 허용하고 그 시기에 국가에게 전쟁권 수행에 관해 제한을 두지 아니었냐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무력의 행사를 금지한 현대 국제법상으로 정복은 침략행위를 구성하고 위법하며 영토취득을 위한 타당한 권원을 보장할 수 없다. “국제연합 현장”제2조 제4항의 규정에 따라 국가의 전쟁수행권과 영토의 취득을 위한 정복권이 제한된다. 영토취득을 규율하는 국제법의 규칙은 수세기 동안 변천되어 왔다. 한편으로, 분쟁에 있어서 문제의 주장과 사태는 그것이 오늘 존재하는 조건과 규칙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취득된 때에 존재하는 조건과 규칙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국제법은 소급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승인되어 있다. 상기 결과에 따라 독도의 영토주권에 관해 우리 정부당국에 의해 기획되는 기본정책과 역사학자에 의해 수집되는 기본연구는 512년의 역사적 권원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 권원을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와 같은 현대국제 법상 타당한 권원으로 대체하는 것이 요구된다.
        8,000원
        26.
        2010.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사부는 왕족 출신의 진골귀족으로, 나가서는 명장으로, 들어와서는 명재상으로 6세기 신라의 비약적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동해안 진출을 주도하고 가야 병탄을 완수한 명장이었으며, 병부령으로, 上臣으로 군정과 국정을 총괄하고 국사 편찬에도 힘을 쏟았던 명재상이었던 것이다. 동해안 진출의 업적은 그의 이력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북방 문물의 유입로이자 고구려와 토착 ‘말갈’(濊) 세력의 침 입로이기도 했던 동해안은 신라에겐 양날의 칼이었다. 신라가 일찍부터 동해안 진출을 시도했지만 동해안의 정세는 늘상 불 안정했다. 그런 동해안에 대한 안정적인 편제의 기틀을 마련한 자가 바로 이사부였다. 실직주 군주와 하슬라주 군주를 연임하면서 동해안에 대한 군사적 진출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우산국 정벌을 통해서 동해 제해권 장악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 육상과 해상에서 동해안을 장악함으로써 동해안의 불안정성을 크게 해소했던 것이다. 그의 우산국 정벌 과정은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목사자를 앞세운 그의 우산국 정벌 이야기는 이후 인구에 회자되었고 저 명한 학인들의 저서에 오르내렸다. 민속놀이 狻猊의 소재로 이용되었고, 막강 해상세력 우산국 우해왕 설화의 핵심 소재가 되었다. 대중가요 ‘독도는 우리 땅’을 통해 이사부의 이야기는 오늘도 노래되고 있다.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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