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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
        202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20년대 한국 농촌을 위한 YMCA와 국제선교사협회의 협력은 계급 이데올로기 혁명을 기획하는 국제공산주의, 정치군사적 통제를 모색하는 제국주의, 또한 상업적 착취를 통한 경제적 부의 확장을 추구하는 강대국 민족주의와 구별되며, 본질적으로 민족의 상호협력과 인류애라는 보편가치를 추구한 기독교세계주의이다. 서구 선교사들은 교회와 국가의 역할을 구별 하는 파송 국가의 정부정책에 순응했지만 국제선교사협회는 거시적인 틀에서 한국의 민족주의자들과 협력하며, 식민정부의 주요 착취대상인 한국의 농부를 위해 종교적, 과학적, 물질적, 인적자원의 국제적 재배치를 총괄 함으로 여타 국제적 흐름과의 차별성을 시사한다. 국제선교사협회는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초월하는 기독교세계주의를 추구했는데, 한국의 농부를 위한 이러한 연대성은 세속국가의 외교경쟁이 가져온 한계에도 불구하고 초국가적 보편가치를 추구하는 중요한 국제주의의 흐름으로 포착된다. 국제선교사협회의 예루살렘대회는 한국의 다양한 교회기관이 교회 자체의 생존에 대한 관심을 넘어 사회병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범교단적 협력과 기독교 농촌연구회의 조직을 고무했으며 태평양문제연구소로 하여금 한국 학자의 토지문제연구를 지원할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대한민국공화국의 토지개혁을 구상할 정부 요원에게 현장지식과 훈련기회를 제공했다. 제국 주의에 관한 거시적 이론을 넘어 구체적인 YMCA농촌운동에 참여하는 국제선교사협회의 활동에 대한 면밀한 자료의 검토는 기독교세계주의가 한국의 민족주의를 폄훼하기 보다 도리어 약소국의 민족역량을 강화하는 자양분으로 작동했음을 입증한다. 한국 YMCA농촌운동과 국제선교사협회의 협력을 연구함에 한국의 민족주의 틀을 넘어서, 일본 식민주의, 피압박민의 민족주의를 대체하며 활동한 국제공산주의, 강대국의 제국주의와 구별되는 기독교 세계주의의 취급이 요청된다.
        122.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의 목적은 초기 내한 선교사들이 한국 무속신앙을 어떻게 이해 했는지를 보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몇몇 연구자들이 선교사들의 한국 무속 이해를 간략하게 언급하였고, 선교사들의 한국 종교 이해를 다룬 연구도 있었다. 그러나 무속신앙에 초점을 맞추어 보다 체계적으로 분석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본 연구는 초기 선교사들이 무속신앙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창을 제공한다. 본 연구는 선교사들이 인식한 한국 종교 체계 속에서 무속신앙의 위치를 다룬다. 한국인들이 무속신앙을 어떻게 느꼈다고 선교사들이 인식했는지도 다룬다. 한국인들의 무속신앙 인식에 따른 다양한 행동들도 분석한다. 한국인들의 무속신앙 속에서 선교사들이 기복주의를 발견했음도 살펴본다. 악귀와 관련된 다양한 무속신앙의 치유방법들이 선교사들에게 목격되었음도 살펴본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무속신앙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며 대결의 대상으로 삼았음도 확인한다. 본 연구의 방법론은 문헌연구이다.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 경험을 토대로 책을 저술하였고, 편지, 잡지, 일기를 통해 그들의 무속신앙에 대한 견해를 드러냈다. 이러한 자료들을 분석하여 선교사들의 이해를 분석하여 정리하게 될 것이다.
        123.
        2017.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1895년 미국 북침례교 계통의 클라렌돈가침례교회(Clarendon Street Baptist Church) 내에서 개인의 후원으로 설립된 초교파 선교단체인 엘라씽기념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의 한국선교에 대한 연구 이다. 본 연구가 갖는 중요성과 역사적 의의 다음과 같다. 첫째, 엘라씽기 념선교회의 한국선교는 교파 선교회가 아닌, 한 개인의 헌신에 의해 설립 된 소규모 초교파 선교단체가 태평양을 건너 먼 이국땅 한국에서 선교의 열매를 맺은 첫 사례라는데 있다. 한국의 개신교 선교는 1884년부터 시작 됐는데, 주로 교파 선교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4개의 장로 회 선교부(북장로회, 남장로회, 호주빅토리아장로회선교회, 캐나다장로회) 와 2개의 미국 감리회 선교부(북감리교, 남감리교), 영국성공회가 그것이 다. 한편, 초교파적인 선교단체의 후원에 의한 독립선교사들도 속속 내한 하였다. 1888년에 입국한 게일(J. S. Gale)은 토론토대학 기독청년회 (YMCA) 후원을 받았으나 1891년 미북장로회로 이적하였다. 게일과 함께 입국한 하크니스(R. Harkness)는 한국연합선교회(CUM) 후원을 받았으나 1889년 6월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인해 한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귀국하였 다. 1889년 펜윅(M. C. Fenwick)은 한국연합선교회(CUM) 후원으로 내한 했으나 1893년에 귀국하였고, 1890년에 입국한 하디(R. A. Hardie)도 토론 토의과대학 기독청년회(YMCA) 후원으로 내한했지만 1898년에 미남감리 회로 소속을 옮겼다. 1893년에 입국한 매켄지(W. J. Mackenzie) 역시 캐나 다 독립선교사로 내한하였으나 1895년 일사병과 신열(身熱)에 의한 정신 이상으로 권총 자살함으로 막을 내렸다. 이처럼 초기에 내한했던 초교파 선교사들은 교파선교사로 이적하거나 귀국 또는 단명함으로 뚜렷한 선교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러나 엘라씽기념선교회는 약 6년간 한국선교를 지 속하여 교회설립이라는 놀라운 선교의 열매를 맺었다. 둘째, 엘라씽기념선교회는 당시 선교지 분할정책 속에서 선교의 사각지 대를 잘 인식하여 선교를 시도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선교지 분할정책은 한국교회사에서 그 명암이 뚜렷할 정도로 공헌과 한계가 분명하다. 선교사 간에 불필요한 마찰 해소하고, 선교의 재정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는 데는 공헌했으나, 30년 이상 이것이 한반도에 적용되므로 인해 선교회 배경에 따라 교회의 특성이 형성되고, 지역성이 더해져 교권분쟁과 교파분열의 단 초가 되었다는 비판은 면할 길이 없다. 폴링의 충청도 선교는 남장로회의 전라도 선교 집중으로 인한 선교 사각지대를 효과적으로 접근했다는데 의 미가 있다. 처음부터 오지선교를 추구했던 엘라씽기념선교회 선교의 빛이 난다. 교파 간의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면서도 선교의 불모지에 복음을 전 했다는 것은 선교의 후발주자로서 매우 바람직한 선교전략이 아닐 수 없 다. 물론 약 6년 남짓의 짧은 기간이 아쉽지만, 그래도 엘라씽기념선교회의 수고와 헌신은 헛되지 않았고, 훗날 펜윅에게 인계되어 한국 침례교회 형 성의 중요한 토대요 모판이 되었음을 감안할 때, 엘라씽기념선교회의 활동 은 재인식되어야 하고,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124.
        2014.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한국 기독교 선교의 기원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는 몇몇 개신교 단체들은 최근 올해 2014년을 한국기독교 130주년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전에, 우리는 1) 용어 사용의 문제, 2) 역사관의 중요성, 그리고 3) 첫 번째 선교사에 대한 논쟁 등과 같은 문제들을 주의 깊게 연구해 보아야 한다. 가장먼저 우리는 ‘기독교(Christianity)’의 의미를 고려한 후,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가 과연 적절한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나 그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로마 카톨릭 교회, 동방정교회, 성공회, 그리고 개신교회를 모두 다 포함하는 매우 포괄적인 용어이다. 만일 한국에서 가장먼저 선교역사가 시작된 천주교의 역사의 시작점인 1784년을 한국기독교의 시작점으로 본다면, 올해는 한국기독교 130주년이 아니라 230주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올해 2014년도를 한국 기독교 전체가 아닌 개신교 차원에서만 기념하려 한다면, ‘한국기독교 130주년’이 아닌, ‘한국개신교 130주년’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들은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역사관의 중요성에 관해서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에서는 한국교회사 혹은 한국선교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크게 ‘선교사 중심의 역사이해’와 ‘한국인 중심의 역사이해’라는 두 개의 역사관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 중심의 역사이해를 하려는 사람들은 1884년 이전에 주로 중국이나 일본에서 초기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개신교 신앙을 접한 초기 한국인들(예를들어, 백홍준의 아버지, 이응찬, 김진기, 서상륜, 서경조, 이수정)에게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물론 이들 한국인들은 한국 개신교 신앙의 개척자들로서 한국개신교 선교를 위해 다방면에서 공헌을 한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한 기독교인 이었는지, 그리고 한국에 교회를 설립한 것이 맞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어떤 이들은 한국개신교 역사의 시작은 외국 선교사들의 한국입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에 온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가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쟁점들이 존재한다. 찰스 귀츨라프는 1832년에 그리고 로버트 토마스는 1866년에 한국에 처음 도착한 것은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과연 진정한 선교사였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한국에 올 때, 서구 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자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의 조력자로 한국에 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 교회사학계와 교회들에서는 1880년대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 가운데에서 그 첫번째 선교사를 찾으려고 한다. 한국감리교의 초대 총리사였던 양주삼은 1880년대 한국에 온 선교사들 중에 로버트 매클레이를 첫 번째 개신교선교사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매클레이가 1884년에 고종으로부터 감리교를 포함한 모든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의료, 교육)에 관해 공식적으로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매클레이가 보여준 한국정부와 한국 사람들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교훈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매클레이를 한국에 온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라고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25.
        2013.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Despite his popularity, the Rev. James S. Gale has not been given sufficient scholarly attention. How could it be? It appears that while Gale has been known as a missionary and a scholar of Korean studies, this two-fold identity has not been appreciated in a comprehensively way: scholars tend to interpret two aspects of his identity as contradictory ones or simply juxtaposed ones rather than as mutually interacted ones. In this context, in the area of Korean studies, they have seen him mainly as a Korean expert, without paying attention to his being a missionary; on the other hand, in the realm of Korean Christian studies, they have largely viewed him as a missionary, without properly relating this to his expertise in Korean studies. This article aims to overcome this discrepancy in the understanding of Gale in the contemporary studies, secular and Christian, in Korea. The thesis of this article is that the mutually integrated two-fold identity of Gale is the key to the understanding of his thought and work; that is, he was a scholar of Korean studies as a missionary. Such characteristics of his being a scholar of Korean studies as a missionar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he prepared himself as a missionary in Korea through cultural identification, through which he gradually overcome his paternalism; second, he equipped himself with expertise in Korean studies, which enabled him to be a first-class cultural missionary, namely, a theologian of missionary indigenization; and last, he bequeathed his legacy as a missionary scholar, which paves the way for Korean studies as mission. Thus, he challenged the understanding of both missionary works and a missionary.
        131.
        199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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