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5

        1.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인조반정 직후 내암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 요인과 그에 대한 대응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정인홍의 문인들은 광해군 정권 시절 조야에서 폭넓게 활동하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거 숙청되어 이후로 막연한 불안감이 정인홍 문인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이들은 반정에 불복하는 세력을 형성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대규모의 옥사가 일어난다. 이로써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 되었고, 불안 요인 또한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 정인홍 문인들의 일차적인 불안 요인은 자신과 스승 정인홍과의 관련성이었다. 박건갑은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옹호하는 소를 올린 적이 있는데, 1624년 10월 옥사에 연루된 박건갑 3부자(박규·박구)의 추국 기록에는 첫머리부터 ‘정인홍의 여얼’이라는 내용을 명시하고 있으며, 박건갑은 이에 대한 해명으로 자신들과 정인홍은 친인척 관계가 없음을 실례를 통해 증명하였다. 특별한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들에게 중형이 내려졌고, 이후 몇 차례의 옥사를 통해 정인홍 문인들의 불안 요인은 더욱 확대되고 구체화되었다. 1631년 2월 옥사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한은 추국청에서 자신은 광해군 시절 정온·이대기 등과 의견을 함께 했음을 강조하며, 자신은 애초에 대북과 거리를 두었음을 역설하였다. 또한 이 옥사 발생 직후인 1631년 3월, 박인·허돈 등 인근 유림들이 덕천서원에서 회합한 일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정인홍이 지은 남명신도비문에 대한 처리 문제를 상의하였고 결국 폐기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판단된다. 강우지역의 인물이 대거 연루되어 처형 등의 처벌을 당한 상황에 직면한 정인홍 문인들이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한 것이다. 1633년 3월에 발생한 옥사에서는 임석간에 의해 대구·고령·성주 지역 인물들이 고발되었는데, 이들은 앞선 1631년 옥사의 주동자 박희집과의 관련성을 추궁받았다. 박희집과 그의 집안은 정인홍과의 관련이 밀접한 바, 불안의 요인은 정인홍 주변 인물과의 관련성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띄게 되는 것이다. 정훤은 우연하게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정인홍 문인이었던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대북 시절 폐모에 반대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2.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계해정변(인조반정, 1623)의 명분은 대개 廢母殺弟 등의 패륜 및 대북의 전 횡에 대한 다른 붕당들의 반발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정변이 성공한 다음날 반포된 반정교서에는 반정의 명분이 광해군의 背明親後金외교(43%), 폐모살제 (31%), 대북의 전횡(14%), 토목공사(10%) 등의 비중으로 발표되었다. 그렇다 면 반정 직후에 널리 강조되었던 외교문제가 이후에 어떻게, 왜 명분에서 사라 졌을까? 병자호란 때 인조는 직접 청 태종 앞에 나아가 叩頭禮를 행하며 항복하 였으며, 정묘호란 때에도 사실상 후금의 무력에 굴복하여 화친을 맺었다. ‘반정’ 을 한 지 4년 만에 그 핵심 명분 하나를 상실한 것이다. 이에 다른 명분인 폐모 살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記述들이 후대에 이르도록 사 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가 하면, 폐모 논의에 가담하였던 북인계열 저자들은 폐모살제보다 권력의 전횡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폐모 논의에 참 여한 약점을 덮기 위해 폐모문제를 최대한 덮고, 그 다음 명분인 권력의 전횡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듯 인조의 거사가 反正이라는 점에는 다들 동의하였으나, 어떤 亂에서 어떤 正으로 돌이켰는지에 대한 세부 문제에 있어서는 강조점이 시대에 따라, 또 저자의 정치적 배경에 따라 달랐다. 결국, 반정의 본래 명분에 대한 후대의 손질은 ‘반정’의 명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조선후기사회 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3.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晉陽河氏 滄洲家는 남명과 내암을 淵源으로 하는 가문으로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남명학파의 핵심적인 가문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창주가는 인조반정 이후 내암 정인홍과의 인척관계로 인해 집권 세력이 견지했던 태도와 경상우도 지역 남명학파가 퇴계학파의 남인으로 흡수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갈 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滄洲 河.이 주도하여 간 행한 ..남명집.. 판본에 대해 1651년 정인홍 관련 문자를 훼손한 사건이 일어났 고, 뒤이어 1665년 진주 유생 崔栢年의 ‘大北餘孼’ 誣告 事件이 발생하였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하여 창주가는 가문이 멸할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창주가는 당색을 老論으로 전환하게 된다. 河.은 창주의 손자로서 창주가가 老論으로 전향하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하명은 내암을 비롯한 大北 관련 문자 및 퇴계 비판의 흔적들을 제거하여 남명의 문집을 淨化하고 퇴계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는 겸재 하홍도 의 의도에 따라 그의 문인들에 의해 훼판되자, ..남명집.. 釐正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리고 인조반정 이후의 경상우도 지역 남명학파의 동향은 하홍도의 입장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하홍도를 중심으로 남명학 파의 주류가 퇴계학파의 남인 쪽으로 흡수되어 갔다. 최백년 무고 사건은 개인의 감정 문제로 인해 발생하였지만, 당시 창주가로서 는 河晉寶와 내암과의 인척 관계가 가문의 흥망을 가늠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 였다. 그래서 하명은 최백년의 무고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정인홍 집안과 통혼 한 점이 부담으로 작용하여 대북잔당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에 결 국 서인의 종사였던 송시열과 송준길 문하를 찾음으로써 창주가의 보존을 추구 하였고, 결국 당색을 노론 기호학파로 전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명은 기호 노 론학파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世誼를 다졌고, 그의 행적은 후손들이 진주지역 노론세력의 구심점으로 자리하고 지속적으로 기호학파 명사들과 사우문인관계 를 맺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4.
        200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진주의 해주정씨는 17세기 이후 진주 지역의 대표적 가문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 져 왔다 이 논문에서 말하는 晉州 의 海州鄭民는 農園 鄭文孚(1565-1624)의 후손 및 농포의 아우 鄭文益(1568-1639)의 후손을 말한다. 농포의 두 아들 鄭大榮 (1586-1658)과 鄭大隆(1599-1661) 및 농포의 아우 鄭文益등 三叔姪이 어떻게 해서 진주에 정착하여 진주 지역의 대표적 가문이 되었으며,남명학파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진주 지역에서 이들이 가진 학문의 성향은 어떠한가 하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진주의 해주정씨는 농포의 아우와 두 아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이 처음 진주로 온 것은 避兵이 그 주된 목적이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전대의 혼인관계로 인 해 상속받았던 田莊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도 또한 분명하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다시 서울 생활을 하려고 했었던 것 또한 확인되는 바였다. 그러나 농포가 李适의 난 이후 昌原府使시절에 지은 詠史詩로 인해 遊謀로 처형당하고,遺言 에 의해 그 아우와 아들들이 진주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부분은 좀 더 생각하게 하 는 점이 없지 않다. 광해군 시대 창원부사 시절의 詠史詩로 인해 반정 이후 인조 시대에 역모로 처형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으로서는 자료가 부족하여 증빙하기 곤란하지만,이는 당시의 집권층이 농포가 광해군 시절 북인으로서 내암 정인흥과의 관 련이 적지 않았다고 보았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물론 농포로서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환멸을 느끼고 자손들에게 정치적 은둔을 유언한 것이 아닌가 판단되는 것이다. 해주정씨가 진주에 정착한 초기에는 南冥學派를 영도하는 위치에 있던 謙齋 河弘度의 지우를 업어 남인으로 입지를 굳히는 듯하였으나,1665년을 전후하여 농포의 신원에 앞장섰던 澤堂 李植의 아들畏齋 李端夏에게 집지하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서서히 노론화한 것이다. 그러나 노론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것은 경종때 남인으로부터 심각한 핍박을 받은 뒤 영조가 즉위한 이후 이에 대한 보복성 핍박을 남인에게 가함으로부터d였다. 이 일이 일어난 지 20여 년 후에 얼어난 宗川書院 禍變의 주동자가 이 가문에서 나옴으로써 남명학파를 주도하던 남인과의 관계가 극히 악화되었고,근가 지역의 노론 학자들로부터 학업을 전수함으로써 이 지역의 남명학파에 대해서는 상대 척으로 관심이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진주의 해주정씨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인과의 관계도 대체로 나빴다고 할 수 있고,남명학파에 대한 관심의 정도 또한 보잘것없다고 할 수 있지 만,문집이나 유고 등을 남겼다는 이가 58 인이나 있다는 것은 학문에 대한 관심만큼은 여타 가문에 뒤지지 않으려 하였던 결과로 보인다. 남명학파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사실로 인해 해주정씨가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지역의 학문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