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우도에 연고를 둔 함인재 정국채는 19세기 전반을 전후로 한 시기를 주요 활동기로 삼았던 노론 계열의 재야 유학자다. 남명학파의 본산 지역에서 자신의 학적⋅이념적 소속을 노론계로 정위시킨 사실도 독특하지만, 정국채의 경우 정주학과 농학 및 예학 등과 같이 제 범주를 아우르는 학문세계를 개척한 정황 또한 매우 이채롭게 여겨진다. 그러나 정국채가 남긴 문집인 『함인 재유고』가 학계의 공적 담론의 장에 접속되지 않은 채 사실상 미공개의 상태를 유지해 왔던 까닭에, 그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전무한 실정이다. 이에 금번 논의에서는 정국채가 향유한 생애의 연대기적 추이를 추적해서 개괄해 보임과 동시에, 특히 그의 학문세계 형성에 관여하였던 두 스승인 성담 송환기와 경호 이의조 간에 교차된 학문적 영향력의 문제를 논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간 축적된 가학의 토대 하에, 42세에 대면한 송환기의 문하에서 정국채는 정주학 전반에 걸쳐서 질적으로 도약하는 심화 학습의 계기를 맞이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송환기의 5대조인 송시열이 수립한 우암학의 계승자로 자처하는 국면으로 이행했던 사실도 주목된다. 한편 이의조와의 대면을 통해서 정국채는 그의 학자적 정체성을 예학자로 정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정국채는 지리한 『가례증해』의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사례촬요』를 저술하기도 했으나, 이의조에게 전한 서신들은 예학이 형성된 연원의 일단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송환기가 매개가 되어 우암학의 계승자로 나선 정국채는 『송자대전』과 송시열의 「연보」를 숙독하는 한편, 주변의 동문들에게 우암의 저술을 필독 할 것을 적극 권유하는 열의를 발휘하기도 했다. 송시열 이상으로 『주자대전』을 예찬하곤 했던 정국채는 성주에 건립된 노강서원의 사액 문제에도 큰 관심을 표했는데, 이 또한 우암학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과 노론계의 도통 계보를 중시한 결과였다. 송환기 사후에 스승을 노강서원에 추배하기 위해 노력하고, 문집 간행을 위해 주도적인 희생을 기울였던 정황 또한 우암학을 적극 계승하려는 의지와 필적할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이 논문은 南冥 曺植(1501-1572)의 4종 神道碑文 중 尤庵 宋時烈(1607-1689)의 「南冥曺先生神道碑銘」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한 명의 인물을 대상으로 당대 최고 문사들이 각각 신도비문을 남기고 그 작품들이 모두 현전하는 경우는 남명신도비문이 유일하다.
송시열이 찬술한 남명신도비문은 남명 조식 사후 100여 년 만에 찬술된 것으로 이전 정인홍ᆞ조경ᆞ허목 보다 학문적 연원이나 사승 관계가 멀다 할 수 있고, 오히려 사후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조식과 송시열은 가장 대치적 관계에서 지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송시열은 정치적ᆞ학문적 입장을 뒤로하고 조식의 不朽한 功業과 序其爲人의 독특한 찬술자세로 남명신도비문을 찬술하였다.
송시열의 남명신도비문은 가장 비지문 창작이 왕성했던 60세 전후에 찬술된 작품이며 영남유림과 조식의 자손들 부탁으로 찬술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10년 전에 지어진 초고본을 다시 찾아 주변 지인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퇴고를 거듭 하며 남명신도비문에 많은 공력을 기울였다.
송시열은 조식의 공로에 대해 세 가지(①貴義賤利, ②可尙恬退’, ③可羞貪冒)로 요약했고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일화를 통해 간략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도록 기술하였다. 조식의 출처관에 대해서는 이황의 말을 인용하며 미화로 여겨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나아가 조식을 성리학자로 최고의 위상이라 할 수 있는 육군자의 반열과 병렬시킨 것은 송시열 이외에 어떤 사람도 하지 못한 일이며 당시 노론 영수로 후대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송시열에게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였다. 송시열은 이황을 포함한 육군자는 조식의 위상과 차이가 없다 생각하였고 바로 이점으로 자신이 조식을 백세의 스승, 영원한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까지 조식을 당파적 영수로 여겨왔다면, 송시열은 당파적, 정치적 외형에서 탈피하여 한 시대의 영원한 師表로 승화시켰다. 바로 이점이 기존 3종의 남명신도비문과의 변별점이며 송시열의 남명신도비문이 지닌 위상이라 할 수 있다.
In this research, we have performed a T-test to see how the relationship between dependent variable or visual point level and independent variable or visual quantity is in order to clear up the correlation between pattern of visual point and visual quantity by the constituents of a view from a different visual point level and the results are as follows:
1) In case of the character of Mt.Uam landscape of the city, Uamsan is set as a fixed point and about a direction of view(D), the north is a datum point from which the range of direction is distributed within 180° westwardly and the visual range(R) is also within 2000m. An elevation is an average of 7.4° and the average story of the buildings is 3.85. Here the height of a story is about 4m so the average of the visual point difference is estimated at 15.4m.
2) The type of visual point is divided into the intersection group and the front of the highly used public buildings group. Double intersection types account for about 78.8%(52 spots) which forms a majority part of LCP.
3) The analysis of the difference of visual point level divided by eye level and that of the top of the buildings has been proved that there's a sharp difference resulted from t-test at 1% significant level. The significant difference of elevation from height difference(15.93m), however, has not been shown.
4) From the result of T-test about visual quantity by the elements of a view from a different visual point level, the visual quantity of mountain(VQM), sky(VQS), ground(VQG) is significant at about 1% each and that of building(VQB) is at about 5%. The difference in visual quantity of a mountain by the visual point level is at about 4% which can meet a marginal level of LCP necessary for evaluation of mountainsca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