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 중기 德溪 吳健(1521-1574)의 학문에서 그의 성리학적 경세론을 알아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먼저 덕계의 학문적 배경과 그가 활동하던 조선시대의 상황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덕계가 강조한 국가의 비전과 대책을 살펴보았다. 이상의 연구결과 덕계의 經世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덕계의 경세관은 정통 성리학의 이념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구체적인 정치현장에서 정통유학의 의리를 그대로 실천하였다. 그는 유학의 정치 이념을 충실하게 실천한 實踐儒學者였다.
둘째, 言論은 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言論은 正義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언론은 역사의 기록이자 志操 곧 正義의 기록이다. 덕계는 정치에 있어서의 疏通은 바로 이 正義를 중심으로 한 자유로운 言路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덕계의 君主論은 聖人君主의 실현이 목표였다. 덕계는 군주의 덕목으로 謙遜・慕善・樂善・敬・誠 등을 강조하였다. 재능 보다는 德을, 威嚴보다는 겸손함을, 말 보다는 실천을 중시하였다. 왜냐하면 誠實하지 않은 지도자는 자신의 말을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덕계는 성리학의 理想을 실현하기 위하여 꿋꿋하게 노력한 선각자였다.
조선중기 덕계의 문언이 생존하였던 당시는 중종 16년에서 선조 7년에 걸친 시대적 상황이었다. 중종초의 정국은 공신중심의 통치체제가 유지되었고, 왕권의 약화라는 훈구세력의 견제를 위한 대응세력의 필요성에서 사림파의 재진출 기회가 열렸다. 중종 9년부터 사림파는 言官에 활발하게 진출하게 되었고, 이러한 인적 기반을 토대로 사림파의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개혁정치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덕계는 정계에 진출하여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덕계는 산음에서 남명으로부터 『중용』, 『대학」, 『심경』, 『근사록』 등을 배웠고, 궁리와 거경에 바탕한 덕계의 학문관에 입각한 교육은 남명으로부터 계승한 학습 자의 개인차를 중시하는 교육과 지득을 강조하는 교육, 그리고 당시 성균관 학유 시절에 행했던 교육으로 구체화되어 냐타났다. 뿐만 아니라, 덕계의 문인들은 다양 한 급문동기에 의해 얼련의 문인집단이 형성된다. 지역적으로는 당시 덕계가 거주 하였던 산청, 한양, 성주지역 등지에서 강학 및 학술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산청 및 함양지역에서의 학술회의로 그 절정을 보게 되는데, 이른바 지곡 사, 단속사, 남계서원에서의 학술회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강학활동은 대체로 학습자의 개인차와 자득을 강조하는 교육, 유생의 평가방법으로서의 4등급 분반 교육, 그리고 평생교육의 장으로서의 강학활동의 의의를 지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