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지역사회에서 전자감시 장치를 부착한 범죄자의 거주 특성이 재범 가능 성에 미치는 영향을 실증적으로 살피는데 목적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현재 1인 가구 비율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상황인바, 범죄자가 누구와 어떤 주거지에 생활하느 냐를 살펴보는 것은 지역사회 교정 차원에서 범죄자의 사회복귀 방향을 판가름 짓는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피해자학 입장이 아닌, 가해자 차원에서 본 연구에서는 위치 추적 전자장치를 부착하고 있는 고위험 범죄자 6,544명의 데이터를 분석하여 1인 가구 비율을 검토하고, 1인 가구와 집단 가구를 혼인관계 및 재범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연구에 사용된 자료는 2008년 10월 이후부터 2017년 10월까지 우리나라에서 전자장치 부착을 경험한 전체 범죄자이다.
빈도분석 결과, 전체 6,544명 중의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자 중 37.8%가 혼자 살림살이를 하고 있는 1인 가구인 것으로 나타났다. 심각한 것은 전체 범죄자 중 21.2% 가 매우 불안정한 주거 상황에서 노숙을 하거나 숙박업소에서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주거부정자라는 점이다. 로지스틱 회귀분석 결과, 미혼집단 모델에서는 재범을 설명하는 변인으로 연령(-), 경제상태(-), 법 준수 순응도(-), 성범죄, 신상정보 공개고지, 1인 가구(집단 가구) 변인이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기혼집단 로지스틱 회귀분석에서는 경제상태(-)와 법 준수 순응도(-), 신상정보 공개고지 세 변인 만 재범발생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미혼집단 모델과 달리 “1 인 가구” 상황이 기혼집단에서는 재범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교정 실무자 및 범죄학자들은 전자장치 부착 범죄자들의 혼인 관계와 1인 가구 주 거 상황을 초기 개입 단계에서 면밀히 조사하여 맞춤형 지도, 감독 전략을 수립하고, 지역사회 내 재범 방지 및 범죄자 사회복귀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도록 범죄자의 혼인 상태 및 1인 가구 여부를 재범억제 활동에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은 중국의 개혁 개방 30년 이래 혼인 영역이 중국 사회 변화의 거센 물결 속에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중국 대표 여성작가인 왕해림의 작품인 『신 결혼시대』를 통해 조명하고자 한다. 왕의 소설은 중국 도시의 두 세대간 3가지 특이한 혼인 유형 즉, 도시-농촌 커플, 연상녀-연하남 커플, 노교수-파출부 커플을 다루는 과정에서 개혁 개방 전후의 신구 가치관의 충돌이 혼인 영역에서 어떻게 비춰지는데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신구 가치관의 대립 및 중국 도시 혼인의 현황은 네 가지 측면에서 관찰된다. 우선, 혼인의 속성에 있어서 모택동 시대의 혁명적인 혼인관이 사라지고 개혁후 사회의 급속한 분화 및 이질성의 증가로 인해 양 결혼 당사자간 집안의 형편이 고려되어야 하는 전통적인 문당호대의 관념이 부활한다. 둘째, 배우자 선택 조건에 있어서 모택동 시대의 금욕주의가 부정되고 물질주의, 외모지상주의 등의 요구가 정당화되는 가운데 전통적인 남재여모의 선택 모델이 주류 관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셋째, 혼인ㆍ성ㆍ사랑 삼자의 관계에 있어서 과거 삼자 일심동체 관계는 개혁 이래 삼자 분리라는 전면적인 도전을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혼인에서의 여성 이미지는 모택동 시대의 강하고 독립적인 철인여성상이 무너지고 부드러운 현모양처의 의존적인 여인상에 의해 대체되어 가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중국 도시의 혼인 문제는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으나 왕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신구 관념의 충돌에서 방황하는 중국의 혼인관이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려는 시도라 할 것이다.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혼속은 아시아・유럽・북부아프리카・아메리카 등 세계의 원주민 사이에 이루어졌던 혼속을 말한다. 인도나 일본의 소수민족 사이에는 최근까지도 위와 같은 혼속이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대완에서는 서조모와 혼인을 하였으며 흉노에서도 서모・형수・계수・며느리와 혼인할 수 있었다. 서역의 당항족은 백모・서모・형수・며느리와 혼인할 수 있고 돌궐에서는 후모・백숙모・형수와도 혼인할 수 있었다. 오・여진・몽골・부여 등에 서는 형수와 혼인하는 혼속이 있었다. 양서・남사・태평어람 등의 사서에 서는 고구려에서도 형수와 혼인하였다고 전한다.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혼속이 최초로 나타난 사서는 삼국사기이다. 고국천 왕이 뒤를 이을 아들 없이 죽자 우씨왕후는 시동생 연우와 통정하고 그를 왕위 에 앉히니 이가 산상왕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고국천왕 부분에 ‘立妃于 氏爲王后’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우씨가 고국천왕의 왕비가 되기 전에 이 미 ‘妃’였을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연나부의 명림씨 가문의 권세를 등에 업고 왕 후 우씨는 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 등 4대에 걸쳐 왕후로 또는 왕태후 로 권세를 누렸다. 뿐만 아니라, 명림씨 가문의 대모 노릇까지 한다. 산상왕은 우씨로 말미암아 왕위에 올라 우씨를 왕후로 삼은 각시바치의 전형이다. 그러 나, 정치적 재능을 지녔던 산상왕은 연나부와 정략적 거리를 유지하며 진대법 을 실시하고 국상 을파소를 기용하는 등으로 연나부를 제어하였다. 산상왕과 우씨왕후 사이에 이루어진 형수와의 혼인 문제를 둘러싸고 당사자 인 산상왕과 우씨왕후는 물론 산상왕의 형제들인 발기・계수・고국천왕은 각기 다른 의식변화를 보여준다. 발기는 산상왕과 우씨왕후의 혼인을 역수와 천륜을 어긴 비례라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싸웠으나 실패하고 만다. 산상왕의 명에 따 라 발기를 정벌하러 나섰던 계수도 산상왕이 국양하지 않은 것을 불의라고 하 면서도 남의 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종국을 멸망시키려 한 발기의 행위 역시 죽 어서 선인을 볼 때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발기를 왕의 예로 장사 지낸 뒤 산상왕은 우씨왕후와의 사이에 뒤를 이을 아 들이 없으므로 소후를 얻겠다는 뜻을 비친다. 산상왕이 주통촌녀와 상관한 것 을 안 우씨왕후는 질투하여 병사를 보내 주통촌녀를 죽이려고 한다. 이 과정에 서 주통촌녀의 유체가 자신의 후사임을 확인한 산상왕은 이를 우씨왕후에게 말 하여 주통촌녀에 대한 우씨왕후의 횡포를 제어하고 주통촌녀를 소후로 삼은 다 음 아들 교체를 태자로 봉하니 이가 동천왕이다. 산상왕의 의식은 다분히 정치 적이고 정략적이다. 왕의 아이를 임신한 주통촌녀를 병사를 보내 죽이려 한 투 기 죄를 짓고도 우씨왕후가 무사했던 것으로 보아 왕후와 연나부의 권력이 산 상왕을 능가했던 것 같다. 우씨왕후는 죽을 때 스스로의 행위를 첩실행이라고 부끄러워하면서 신하들에 게 자신을 구렁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산상왕릉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다. 이 미 죽은 고국천왕은 무당의 입을 빌어 우씨왕후의 행위를 낯이 뜨거워 백성을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산상왕과 우씨왕후의 혼인문제를 놓고 권근・서거정・안정복・최 보 등이 천륜을 어긴 수혼이라고 비판하였다. 경국대전과 증보문헌비고에 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첩이나, 백모나 숙모, 형수나 계수와 혼인한 자를 극 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까지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유습 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