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면구조 안정성 다이어그램은 층면구조가 주어진 입도와 유속에서 나타나는 층면구조의 모양과 크기를 지시한다. 이 다이어그램은 대부분 수조실험에 의해 획득한 실험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수조실험은 입자의 크기와 유속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분급이 좋고 단일입도의 분포를 보이는 퇴적물을 이용하여 수행되었다. 이 다이어그램에 의하면, 세립사와 중립사 퇴적물 표면에서 유속이 빨라지면서, 평행층에서 연흔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 연구의 목적은 층면구조 안정성 다이어그램의 결과가 실험을 통하여 잘 재현되는지를 확인하고, 분급이 좋은 퇴적물과 달리 분급이 불량한 경우인 이정 입도 분포를 보이는 사질 퇴적물에서도 잘 재현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본 연구 실험 결과는 2D 연흔이나 3D 연흔 층면구조가 형성되기 위해서, 분급이 불량한 퇴적물의 경우에, 분급이 좋은 퇴적물보다 더 높은 유체의 유속과 전단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탄산염 퇴적물은 수력학적 분급작용이 활발하지 않으며, 퇴적물의 구성이 알로켐과 기질로 이루어지는 이정 입도 분포를 보이는 퇴적물로서 일반적으로 분급이 불량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실험의 결과는 탄산염 퇴적물에서 층면구조 형성을 위해 쇄설성 퇴적환경의 퇴적물 보다 더 높은 유속이 필요할 수 있음을 제안하고 있다. 분급이 불량한 퇴적물 입자가 침식되어 이동기 위해 더 높은 에너지와 유속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급 효과, 마찰 효과, 안정성 효과, 갑옷 효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예비적 고찰로서, 이어지는 연구를 통해 이러한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입도와 층면구조 형성의 상관성을 보다 정교하게 규명하고자 한다.
논문은 남명 조식이 정주학을 수용한 양상이 어떠했는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관련 자료의 제시를 통해 ‘고증’에 초점을 두었으며, 학기유편을 중요 자료로 이용하였다. 조식의 저술에서 朱子보다 二程이 중시되었던 점에 착안하였고, 남명학에서 ‘실천’이란 두 글자가 학문적 특성을 논하는 데 중요한 단어임에 주 목하였다. 실천을 중시하였던 남명학의 특성상 주자보다 이정이 중시되었을 것 이고, 특히 明道가 중시되었음은 조식의 학문연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이라 하겠다. 이것은 조식이 공자와 周濂溪・程明道・주자 이 네 사람의 초상화를 그 리고 때때로 존경하고 사모하였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결국 退溪 李滉이 伊 川과 주자를 잘 배운 학자라면 조식은 이정, 특히 명도의 사상을 잘 체득한 학 자라고 할 수 있다. 남명학에 내포된 莊子的 요소, 陽明學的 요소 등 정주학 이 외의 여러 요소는 명도의 사상을 매개로 할 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구암 이정(1512-1571)은 1544년 그의 나이 33세 이후 퇴계를 사사하여 그 학문을 표적으로 삼아 자신의 학문을 이루려 하였음은 물론, 인근 고을에 거처 하던 남명과도 끊임없이 친분 관계를 유지하며 그 고상한 정신 경계를 추앙하 여 자기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구암의 「신명사부」는 남명의 「신 명사도명」과 명칭만 유사한 것이 아니라, 남명 사상의 핵심이라 할 경의 사상을 자기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구암은 퇴계와 함께 남 명을 자신의 학문 표적으로 삼아, 평생을 성의와 집념으로 위기지학에 종사했 던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는 주자학적 방법만으로도 성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래서 주자학만을 고집하는 崇正學의 기치를 내걸어 이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가 는 사람을 指斥하기에 이르렀다. 남명은 성현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중요하다 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주자학적인 요소가 아닌 것이 학문 방법으로 원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퇴계는 목적을 위해서는 방법이 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 는 것이고, 남명은 자신에게 맞는 여러 방법을 사용하여 목표를 이루는 것이 중 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구암이 학문의 표적을 퇴계에게도 두고 남명에게도 두었으나, 세상에서는 대 체로 구암의 학문이 퇴계를 이은 것으로만 언급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는 앞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구암의 학문 표적을 퇴계에 게만 두고 남명과는 친분 관계 이상의 학문적 영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는 구암의 학문에 대한 진실한 접근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로 인해 남명학파 내에서도 구암의 위치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위치를 찾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제 우리는 구암을 한강이나 동강처럼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아우르는 노 력을 한 초기 인물로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덕계가 퇴계・남명 양현 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한강과 동강을 이끌어 양현의 학문을 겸하도록 하는 데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듯이, 구암은 덕계나 한강・동강보다 먼저 양현 의 학문을 표적으로 하여 하나의 통합된 학문을 추구하였다고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