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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寒岡 鄭逑(1543~1620)의 학문경향과 정주학의 수용양상을 조명해 본 것이다. 한강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영남사림의 대 표적 인물이다. 그는 타고난 자질과 家學으로 내려오는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바탕위에 당대의 큰 스승을 찾아뵙고 그들의 학문적 장처를 두루 섭렵하였다. 이를테면, 한훤당 김굉필의 正學과 남명 조식의 正論과 퇴계 이황의 진실한 도 [的旨]를 받아들여 이후 당대의 독특한 학문경향을 형성하였다. 그의 학문경향은 下學重視의 경향과 博學의 추구이다. 하학중시의 경향은 일 상생활의 기본예절을 실천하는 하학공부를 통해 天理인 上達로 나아가는 학문 차서를 강조하는 학문관점이고, 박학의 추구는 학문의 규모와 범위가 宏博하다 는 것인데, 그만큼 현실의 쓰임에 대비하는 실용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 다. 나아가 이 같은 학문경향은 당대의 학문풍조에 대한 경종과 반성적 의미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한강은 20세 전반에 자신의 학문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 것은 과거의 길을 단념하고 求道의 자세로 정주가 남긴 성리학에 종사하는 것 이었다. 그가 남긴 정주학과 관련한 편찬저술의 특징을 살펴보면, 성리이론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고 심성함양이나 내면의 수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다른 하나는 편찬저술이 자기 학설을 내세우는 저서의 형태라기보다는 경전 중 에 학문의 요점을 발췌, 요약하고 간간히 자신의 설을 붙이는 ‘編N’이나 ‘集N’ 의 저술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정자와 주자, 퇴계의 편찬저술 방식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한강의 수양론은 퇴계와 남명의 수양론의 장점을 취하여 ‘敬’과 ‘義’를 다 같이 중시하는 ‘敬義夾持’의 수양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정이천과 주자, 그리고 퇴계로 내려오는 수양론의 학문적 전통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 점이 한강 수양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2.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鄭琢은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이자 관료였다. 그는 이황에게서 心學의 요체를 배워 스승을 중심으로 심화되고 있던 조선 유학의 心學化 현상 의 한 가운데에서 활동하였다. 조식으로부터는 壁立千仞의 기상을 배워 불굴의 절의를 실천하였다. 그의 정신 세계의 원천은 유학의 경전이었고, 그 중에서도 󰡔소학󰡕, 󰡔대학󰡕, 󰡔중용󰡕을 가장 중시하였다. 내용적으로는 경-중용-절의의 세 요소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하나의 체계를 구성한다. 중용과 절의를 최 선의 가치로 본 유가의 철학에 세계와 인간의 신성함에 대한 성찰을 더하면서, 수양에 의한 인격화 및 사회적 확산을 도모하는 도정에 나타난 것이 정탁의 학 문이다. 그의 시대의 사림파들은 도덕으로부터 독립된 利害의 세계를 허용하는 대신 의리론에 입각하여 이해의 세계를 재해석하고, 이해 타산이 아닌 순수한 도덕 감정에 의해, 私心없는 도덕성에 의해 영위되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그것 은 일상의 세계를 이상적 도덕 관념과 실천으로 엄밀하게 통제하여 감을 뜻한 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心性論과 理氣論을 검토하고 그로부터 추출된 진리 를 修養論에 의하여 體化하고자 한 것이 이 시대 학자들의 학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의 영향 하에서 도덕적 관념을 일상화하고,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신 성화하는 정탁의 생각은 도덕적 근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아주 좁은 시각이다. 정주학적 세계관과 윤리관의 착근과 순수성에의 몰입은 이념의 경색화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전기 관학파가 의리와 함께 실리 를 함께 중시하다가 이해의 함정에 빠졌다면, 사림파는 도의의 순정성을 중시 함으로써 일상에 대한 탄력적 대응 능력을 상실하였다. 정탁은 정주학이 이 두 모습을 모두 드러내던 시기에 활동한 학자였다.
        3.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鄭仁弘의 晦退辨斥은 광해군 초에 실현된 五賢從祀에 대응한 것이었다. 오현 종사는 선조초 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彦迪 등 四賢에 대한 종사 요청을 그 연원으로 하고 있었다. 이 중 이언적은 乙巳士禍 때의 행적으로 인한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李滉의 평가에 힘입어 종사 논의에 포함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반에서 이황을 포함한 오현종사는 東方의 道統을 설정하 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선조는 즉위 초 사현종사를 수용하지 않는 대신 이들의 행적을 수집 정리한 󰡔國朝儒先N󰡕을 편찬함으로써 이들이 담지한 도통의 구도를 일정하게 인정하 였다. 그러나 재위 후반 신하들의 국왕에 대한 태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화되 면서 이언적과 이황을 강도 높게 비판하였고 오현종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 론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광해군은 즉위 초 公論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정치적 선택에 따라 오현종사를 실행하였다. 정인홍은 이에 대응하여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 다. 그의 회퇴변척은 程朱學이 설정하고 있던 道統論을 조선에 적용시키는 논 점에서 전개되는 것이었다. 정인홍은 변척 과정에서 朱子와 관련된 사례를 적 극적으로 원용하였다. 주자가 孟子와 顔子를 변론한 것과 陳建이 주자를 변론 한 것은 결국 주자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도통의 학문적 실천으로 평가될 수 있 는 것이었다. 정인홍은 이를 동방 도통에 적용하면서 학술적 성과보다 도학의 실천적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오현종사 논의에서 김굉필과 조광조는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편 적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언적의 경우 정치적 혐의에도 불구하고 이황의 인정에 힘입어 종사될 수 있었다. 이것은 학술과 행적 모두에서 이황에게 集大成의 의 의를 부여하는 토대가 되었다. 정인홍은 이러한 구도에 부당함을 느끼고 도학 의 실천적 측면에서 도통의 일원적 설정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경학적 측면에서 보면 󰡔中庸󰡕의 요체를 時中으로 이해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는 顔子의 은거를 時中의 道에 부합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그 연장에서 曹植의 위상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조식을 조광조와 정여창에 대한 평가와 연결함으로써 出處에 대한 엄격한 평가를 통해 도통이 설정되어야 한다 는 원칙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원칙을 통해 이언적과 이황은 時中의 道에 어긋 난 사례이며, 따라서 문묘 종사는 부당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4.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논문은 남명 조식이 정주학을 수용한 양상이 어떠했는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관련 자료의 제시를 통해 ‘고증’에 초점을 두었으며, 󰡔학기유편󰡕을 중요 자료로 이용하였다. 조식의 저술에서 朱子보다 二程이 중시되었던 점에 착안하였고, 남명학에서 ‘실천’이란 두 글자가 학문적 특성을 논하는 데 중요한 단어임에 주 목하였다. 실천을 중시하였던 남명학의 특성상 주자보다 이정이 중시되었을 것 이고, 특히 明道가 중시되었음은 조식의 학문연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이라 하겠다. 이것은 조식이 공자와 周濂溪・程明道・주자 이 네 사람의 초상화를 그 리고 때때로 존경하고 사모하였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결국 退溪 李滉이 伊 川과 주자를 잘 배운 학자라면 조식은 이정, 특히 명도의 사상을 잘 체득한 학 자라고 할 수 있다. 남명학에 내포된 莊子的 요소, 陽明學的 요소 등 정주학 이 외의 여러 요소는 명도의 사상을 매개로 할 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