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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은 겸재 정선이 양천현령시절 제작한 화첩이다. 영조 18년(1742) 10월 보름날, 임술년을 맞아 경기도관찰사 홍경보가 경기 동부지역을 순시 중에 삭녕 우화정으로 경기도 관내 최고의 시인 연천현감 신유한과 최고의 화가 양천현령 정선을 불러들여 연천의 웅연까지 뱃놀이를 즐겼고, 정선은 이 이벤트를 〈우화등선(羽化登船)〉과 〈웅연계람(熊淵繫纜)〉두 점으로 그렸다. 그림의 제목대로 삭녕 우화정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는 장면과 웅연에 도착하여 닻을 내리는 장면을 각각 담은 것이다. 이 모임은 같은 임술년(1082)에 가졌던 북송대 문인 소동파(蘇東坡)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660년 전의 고사(故事)를 추모하여 재연한 행사였던 셈이다. 이를 밝힌 홍경보의 서문과 신유한의 글 ‘의적벽부(擬赤壁賦)’ 일부, 그리고 정선의 발문(跋文)을 합하여 꾸민 서화첩이 《연강임술첩》이다. 기존에 알려져 있던 화첩본 이외에 새로이 2011년 11월 필자가 참여한 동산방화랑 기획전에 또 다른 《연강임술첩》이 공개되었다. 정선이 화첩의 발문에 밝힌 대로 세 화첩 가운데 두 번째가 출현한 셈이다.《연강임술첩》의 〈우화등선〉(도6)과 〈웅연계람〉(도7) 두 폭은 소동파 적벽부 관련 고사도이자 실경산수화이면서, 동시에 경기도관찰사의 선유 행사를 담은 기록화이다. 옆으로 긴 화면을 적절히 소화한 대가다운 구성방식을 보여준다. 고운 비단에 비교적 강한 먹을 쓰고 옅은 담채와 먹의 농담으로 늦가을의 정취가 살짝 감돌게 그렸다. 강변의 절벽과 암봉(岩峯)은 북종화풍인 농묵의 부벽준(斧劈皴)을, 먼 토산과 근경언덕은 피마준(披麻皴)과 태점(苔點)의 남종산수화풍을 구사했다. 남북종화풍을 조화시켜 임진강변의 풍광을 그렇게 담아낸 것이다. 겸재가 통상 현장사생을 거의 하지 않았듯이, 아마 두 점도 관아에 돌아와 기억으로 이미지를 재구성했을 것으로 본다. 실경그림과 실경현장을 비교하기 난감할 정도로 이상화 시켜 놓았다. ‘의취(意趣)를 살리며 외형 닮기에 소홀히 했다’는 당대 문인 이하곤(李夏坤)의 지적을 실감케 하는 진경작품이다. 그리고 좌우로 긴 풍경에 행사장면과 그 주변 등장인물이나 경물들을 소홀히 다루지 않고, 기록화적 성격까지 적절히 살려놓은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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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겸재 정선의 쌍도정도에 표현된 지당에 대한 고찰로서 쌍도정지 그림을 실경의 관점에서 조명하여 문헌 및 고지도 분석과 해석과 현장조사 및 향토사가들의 인터뷰 결과를 바탕으로, 현장과 그림 속 실경을 비교하고자 하였다.또한 쌍도정지의 위치 및 입지장소성을 확인함으로써 쌍도방지의 복원의 기초자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쌍도정지는 전통정원 유적의 현장을 비교적 정확히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공간 자체가 매우 유서 깊은공간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발굴을 통한 원형복원의 당위성과 기대가 가일층 간절해진다. 본 연구를 통해서 해결하지는못했지만 1)쌍도정도에 표현된 역학적 도해와 2)쌍도정지의 조영자로 본 고산 윤선도 그리고 겸재 정선과의 관련성은추후 학제적 접근으로 풀어나가야 할 전통조경적 과제로 되새겨야 할 것이다. 본 연구를 계기로 겸재의 쌍도정도에나타난 쌍도정지의 복원은 물론 오늘날 성주군 조선후기 관아정원의 모습 및 전통경관적 산수시스템 등 전통경관의원형복원 및 회복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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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안계 마을은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가 급격히 쇠퇴하던 시기에 오히려 남명 사상을 심화, 발전시킨 마을이다. 안계의 남명학은 그 후로 진양 하씨 문중의 가학 형태로 전승되면서 근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홍도는 안계 마을 남명학의 시작이자 중심이었다. 남명 조식의 학문은 하항과 하수일을 거쳐 하홍도에 전수되었고, 하홍도는 소멸될 지경에 빠진 남명학파의 사상을 심도 있게 발전시켜 후학들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홍도가 남긴 『겸재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홍도를 기리는 만사와 제문에서 많은 후학들이 이러한 측면을 인정하는 내용을 볼 수 있고, 그가 직접 쓴 글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내용이 많다. 특히 그는 인조반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의식을 가졌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의 문집에서 간혹 은미하게 이러한 사상이 드러난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바로 『겸재집』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는 직접적인 원인이 아닐까 한다. 안계 마을의 남명학을 주도했던 최초의 인물인 하홍도는, 자신의학문과 사상에 대한 이처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안계 마을이 근대에 이르기까지 남명학이라는 학문과 사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홍도의 역할에 크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