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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3.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한국문학사에서 프로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문제적 비평가이자 작가인 김남천의 기독교 인식의 특징을 작품을 통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작업은 기존의 김남천 연구에서는 간과되었던 부분으로 식민지 시대 프로문학 계열의 작가, 작품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배제되는 영역이다. 대부분의 프로문학 작가들이 기독교에 반감을 갖고 기독교를 사회주의 운동이 타개해야 할 대상으로 언급했기 때문에 개개인의 의식 속에 있는 기독교 인식의 다양한 측면은 간과되었다. 그러나 김남천의 경우 개인적 체험과 삶의 과정 속에서 경험한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작품을 통해 형상화되어 여타의 프로문학 작가들과는 변별되는 특징을 보인다. 김남천의 소설에서 기독교적 요소와 긍정적 인식이 드러나는 것은 주로 카프 해체 이후 1939년경부터이며 전향소설로 규정되는 작품들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기독교를 자아 각성과 민족개화의 매개사상으로 인식하면서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작품에 표현하거나, 기독교인을 개화인의 표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를 종교적 차원의 개인적 신앙으로 승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서 행동의 변화와 깊이 있는 종교 인식은 부재한 양상을 보인다.
        5,700원
        3.
        201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n this article I studied the novels and essays of Park Hwa-Seong, who was a representative woman in the 1920-30s as a tendency writer. She wrote a lot of novels over 60 years from 1925 when she became a writer till 1988 when she died. The literary world of Park Hwa-Seong changed greatly according to the conditions of times. In this article, above all, I want to focus on her novels that dealt with the christianity as a subject matter in order to prove the characteristics of recognition of christianity expressed in her works. This study can be an example of how the tendency writers of the 1920-30s recognized christianity and expressed their ideology in their work. Park Hwa-Seong had a specific biography in respect of christianity as a tendency writer in the 1920-30s. She was baptized as an infant and led a religious life very eagerly in her youth. However, as she became a tendency writer and wrote realistic novels reflecting the conditions of the bard times, Japanese colonial era, she wrote novels which expressed negative recognition of American missionary and protest providence of God. In the 1920s-30s, the tendency writers looked upon christianity as a certain ideology for tbe perspective of socialism and criticized it on the ground that christianity could not improve the conditions of colonial reality. As an intelligent leader, she considered anti-christian emotions as an act of nationalistic faith to overcome Japanese colonial conditions. So the reason why she wrote negative christian view in her novels in the 1930s was to disclose the feeling of helplessness of christianity which couldn't revolutionize the dismal reality of nation. For examnple, the short story "Hangui" showed the question of theodicy, why the good had to suffer from hunger and poverty despite the prosperity of the evil. She doubted about the presence of God and became a skeptic of God in her life. Nevertheless she didn't leave the christianity and lived a christian life in a specific method. If she had not known the christianity,she could not have written such a novel that raised a metaphysical question about the providence of God. Through her life, Park Hwa-Seong created works differently according to the times. But as she was a writer who had related with christian background from her childhood,in the time of Japanese colonial period, she used christianity as subject matters in her works. AIso she showed christian consciousness in the form of negative as a tendency writer and expressed writer's recognition of chrisrianity as a skeptic of God honestly in the latter part of her literary world.
        6,100원
        6.
        2018.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내러티브 연구는 여러 학문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기독교에서의 내러티브는 설교해석과 성경연구, 성경인물 탐구의 도구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내러티브의 의미를 살펴볼 때, 내러티브는 단지 이야기로서의 내러티브는 아니다. 본 연구에서는 기독교 인식론을 앎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성에서 살펴보고, 내러티브 관점에서 기독교 인식론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내러티브 관점에서 기독교적 인식론을 살펴 본 결과 서로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 할 수가 있었다. 첫째, 전인격적인 앎은 내러티브의 사고 즉 인격적 앎과 유사성을 가진다. 둘째, 기독교적 인식론의 공동체적 경험의 성격은 내러티브의 경험의 구조화와 유사하다. 셋째, 기독교적 인식론의 상호 관계적 성격은 내러티브의 구성주의적 사고와 학습의 특징과 비슷하다.
        7.
        2016.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이 성서 번역과 지식 전달의 도구로 한글을 사용함으로써 한글을 재인식시키고 더 나아가 한글 공동체를 형성 하는 데에 끼친 공헌을 다루었다. 한글은 창제 이래 “양층 언어”라는 독특 한 언어 상황 속에서 한문의 하위 언어로서의 지위를 한번도 벗어 보지 못 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중화사상이 흔들림에 따라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 졌던 한문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그 자리를 대신하여 한글은 국문 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게 된다. 하지만 한글은 현실적으로 국문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고 국한문 혼용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것이 19세기 말 조선의 언어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들은 성 서번역과 문서 출판의 도구로 한글을 과감하게 선택함으로써 한글이 하나 님의 말씀을 전하고 지식을 전달하는 상층 언어로서 인식되는 데에 큰 공 헌을 했다. 한글이 처음으로 유교 경전의 내용을 담던 한자와 대등한 지위 를 부여 받게 된 것이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공헌은 단순히 한글을 재인식 시키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같은 문자 로 같은 정보를 공유하고 공론에 함께 참여하는 한글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볼 때 선교사들은 19세기 말 한글이 국문으 로 탄생되는 시기에 한글의 가치를 재인식 시키는 데에 매우 영향력 있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
        8.
        2016.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3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기독교계엔 바르트에 대한 열풍에 가까운 관 심으로 다수의 바르트 신학 관련 번역서들이 출판되었다. 그와 비교할 때, 한국의 기독교 출판계는 선교사들의 통제 하에 기초적인 단계의 신학 및 신앙서적들의 번역소개에만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에 비해 당시의 최 근 신학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중요 신학 서적들의 번역 소개는 충실히 이 루어지지 못했다.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칼 바르트에 대한 사상이 소개되는 것은 1930년대 초반부터이며, 주로 신문과 잡지에 바르트 신학의 기초 적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 해방 전후 한국교회에서 활동한 대부분의 신 학자들은 ‘바르티안’(Barthian)들이었으며, 대부분 1930-40년대에 유학한 일본의 여러 신학교 출신들이었다. 해방 직후 신진 학자들의 칼 바르트 대 표 저작의 번역출판 시도가 있었지만, 6.25전쟁의 발발로 지체되었고, 이후 1950년대까지는 바르트 등의 최근 신학 저술들이 번역 소개되어도 대부분 이미 출판된 일본어 번역서를 모본으로 삼아 한글 번역을 시도한 결과였 다. 그러나 1960년 전후부터는 일본어 번역문의 피동적 수용 자세를 탈피 하기 위해 독일어 원문과 영문 텍스트를 직접 한글로 옮기는 등의 주체적 수용 노력을 보인다. 비록 일제강점기의 한국교회와 기독교 출판은 일본의 신학계와 기독교 출판계의 성과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해방 이후부터는 구미의 신학을 직접 배우고 익혀, 한국인의 정신사와 종교문화에 걸 맞는 번역과 연구 성과들을 출판물로 산출하기 시작했다.
        9.
        2014.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에서는 이용도의 시대인식과 조선적기독교를 연구하였다. 먼저 그의 시대인식을 파악하기 위해 그가 조선교회, 선교사 및 서구교회, 그리고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고찰하였다. 또 이런 시대인식이 예수교회의 설립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조선적 기독교 운동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고찰하였다. 이용도는 조선교회의 정통주의적 주류 신앙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선교사 및 서구교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전형적인 반교회적, 반선교사적인 인물로는 평가할 수 없다. 그는 협성신학교를 입학한 후 정치적 민족주의를 포기하였다. 때문에 예수교회의 설립은 일본에 대한 민족주의적 동기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용도가 예수교회를 설립한 이유는 조선교회의 신앙적 체질을 바꾸고자 한 그의 시도가 장로교회의 견해와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적 기독교 운동의 관점에서 예수교회는 서구교회로부터의 신학적, 경제적 독립보다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발생하였다. 체험적이고 실천적인 신앙을 추구하였던 이용도 지지자들은 기성교회의 권위에 부딪히자 독자적인 교회의 설립으로 나아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