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제1차 진주성전투에 있어서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의 역할을 구명하기 위한 논고이다. 주지하다시피, 진주성전투는 진주목사 김시민 등이 혈투를 전개하여 진주성을 지켰던 승첩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때 김성일은 경상우도관찰사로사 김시민 등을 지휘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초유사로 활동하던 김성일은 경상좌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초유사직에 물러나 잠시 경상우도를 떠났다가 다시 경상우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 사이에 개령, 성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거창 방면을 위협하고 있는 가운데, 부산 창원 방면으로부터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경상우도 관찰사로 부임한 김성일은 최고의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역량과 전술운용으로 진주성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김성일은 진주목사 김시민 등을 주축으로 관군 중심의 수성체계를 구축하고, 진주성 외곽에 관군과 의병을 배치하여 구원하게 함으로써 진주성을 공격하도록하는 전략을 운영하여 진주성 방어력을 강화함은 물론, 분산전을 유도하여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의 전력을 약화시켜 진주 수성군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아울러 포위된 진주성에 화살 등의 물자를 공급하여 줌으로써 전투력을 유지하고 군사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진주성 전투 직후 그는 거창 방면으로 쳐들어 오는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하여 삼가로 달려가, 주변 지역의 관군을 거느리고 의병장 김면, 정인홍 등을 도와 이를 막아내었다. 이후 의병장 김면, 정인홍 등은 전라도 의병장인 최경회 임계영 등이 성주, 개령 지역의 일본군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마침내대 다음해 2월 성주, 개령지역을 수복하였는데, 여기에도 관찰사로서 김성일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진주성전투의 승리는 경상우도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김성일의 전략과 진주성의 수성장이었던 김시민의 절묘한 전술운용, 그리고 각 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수행했던 제장과 사졸의 분전이 어우러진 값진 결과였다. 진주성 전투에서의 승리는 진주성을 지킴으로써 수만의 성내 관민의 목숨을 구한 것은 물론이고, 경상우도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게 하였으며, 나아가 일본군이 호남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을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7-19세기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노력 이 지속되었으며, 전쟁 상대국이었던 조선과 명의 문헌도 수집 정리 대상에 포함되었다. 근세 일본에서 임진왜란 문헌군이 형성될 때 가장 큰 영향을 미 친 외국 문헌은 명나라의 「양조평양록」과 조선의 「징비록」이었으며, 그 밖 의 문헌들은 상대적으로 이용되는 비중이 낮았다. 이 논문은 이상과 같은 전 제에서, 김성일의 저작인 해사록과 「학봉선생문집」 그리고 김성일 그 자 신의 이미지가 근세 일본 특히 쓰시마 번에서 어떻게 유통되었는지에 대해 「조선통교대기」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그 결과, 「학봉선생문집」 초간본에 포함된 「해사록」이 쓰시마로 넘어가서 이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쓰시 마번과 일본 본토에서 공히 김성일과 1590년 통신사행에 대해 부정적・경멸 적 인식이 통용되다가, 「징비록」의 일본 유통으로 인해 본토에서는 그 인식 이 일변하여 “충신” 김성일 상이 수립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 글은 김성일이 임진왜란 당시 어떤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초유사 또는 경상우감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했고, 그것이 임진왜란의 극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가늠하는데 주안점이 있다. 김성일은 전형적인 퇴계학파 계열의 학자·관료였지만 인간적 성향 및 기 질에 있어 조식 및 남명학파와의 친연성이 컸고, 최영경의 신원운동을 주도 하는 과정에서는 강우 남명학파권 인사들로부터 상당한 신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런 바탕 위에서 그는 김면·곽재우·정인홍 등 남명문인이 중심이 된 의병조직을 원만하게 지휘·조율하며 전란에 대응했고, 그 결과로서 호남 을 수호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또한 김성일은 수십년 관료 생활의 과정에서 형성되어 있었던 조정 관료 들과의 인적 연계망을 최대한 활용하며 직무를 수행해 나갔다. 류성룡·김우 옹·유근·김응남 등 주로 동인계 중진 관료에 집중되어 있었던 관료적 네트워 크는 군량의 조달 및 확충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결국 김성일은 남명학파와 의 사적(私的) 네트워크와 재조 관료들과의 공적 네트워크를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며 공인으로서의 책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것이다. 그가 통신사행에 따른 실보(失報)에도 불구하고 영남재조론(嶺南再造論)의 측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