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S. 엘리엇은 단테의 『신곡』과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앵글로 가톨릭의 종교 시인이다. 엘리엇은 세 명의 여성으로부터 시신이자 삶의 자극제로서 영향을 받았다. 어린 시절에 엘리엇에게 큰 영향을 끼친 어머니가 느꼈을 배신의 감정에 대한 미안함에 엘리엇은 코리올란이라는 비극적 영웅을 만들었다. 전 부인 비비안에 대한 죄책감은 엘리엇에게 앵글로 가톨릭 신앙의 속죄의 길을 가는 깊은 시련을 주었다. 에밀리 헤일은 엘리엇의 문학의 시신으로 베아트리체였으나 발레리와의 결혼으로 실망을 주었다. 엘리엇은 세 명의 여인들에게 빚진 죄를 참회했다. 엘리엇은 자신이 진 배신의 죄를 초기 시부터 작품에 반영하였다. 『황무지』에는 군대에 간 남편을 배신하는 여인들의 대사가 나오며 『코리올란』은 1편 「개선 행진」과 2편「한 정치가의 어려움」으로 되어 있는데 영웅 코리올란은 오만에 차서 조국과 어머니를 배반했다. 엘리엇은 자신의 분신인 해리와 에드워드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정화하기 위하여 『가족 재회』와 『칵테일 파티』에서 속죄와 고백성사의 길을 보여 주었다.
본고는 『삼국지』와 『삼국지평화』, 그리고 『삼국연의』에 이르기까지, 여포의 ‘義父殺害’ 고 사가 어떤 양상으로 變容되었는지 살펴보았다. 각각의 작품들은 여포와 정원·동탁과의 관계 및 그들이 여포의 손에 살해되는 과정 등을 相異하게 묘사하였기 때문에,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여포의 배신 요인 역시 차이가 있다.
역사서 『삼국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여포는 “용맹하나 지모가 없는(勇而無計)” 인물로, 올 바른 정세 판단을 하거나 제대로 된 主君을 알아보지 못했다. 즉, 어리석음이 그를 배신자의 길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겠다.
元代 『삼국지평화』는 여포의 배신에 허구를 더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 작품 에서 정원과 동탁은 여포가 살해를 저지를 정도로 그를 극단으로 몰아붙였고, 때문에 여포의 살인은 배신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삼국지평화』에서 여포는 反面人物이기 때 문에, 그의 살해 동기를 크게 부각시키지 않는다.
『삼국연의』의 여포는 과도한 자부심을 가진 인정욕구가 강한 인물로, 그의 판단과 행위의 준거가 되는 것은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만족 여부이다. 여포는 정원과 동탁으로 인해 나 르시시즘이 억압되자, 그들을 죽이는 배신을 저질렀다. 그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기중심적으 로 해석하고 판단했기 때문에 배신을 거듭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결국, 『삼국연의』의 유행과 영향으로 인해, 여포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반성을 모르는 배 신자’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① 詩題: <和國信張宗益少卿過潭州朝拜信武殿> 潭州: 文淵閣本과 中華書局本의 《蘇魏公文集》에서의 표기는 모두 “潭州”이지만, 이는 “澶州”의 오기이다. 潭州는 湖南省의 長沙를 가리키는데, 이 潭州는 北宋 元豊3년 이전의 奉使路線과는 동떨어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澶州에는 眞宗의 神御를 모신 信武殿이 있었고, 蘇頌에 앞서 出使했던 劉敞과 沈遘가 澶州에서 澶淵之役을 회상하며 각각 〈朝謁信武殿二首〉와 〈信武殿〉을 지었다는 점은 필자의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張宗益: 蘇頌의 〈前使遼詩〉와 韓琦․文同 등의 시로부터 그가 熙寧 원년을 전후하여 澶州․河間府 (및 相州) 등지에서 봉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北宋 河北路에서 다년간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胡宿은 그를 河北東路 방어의 전문가로 인정하고 있다.
② 제1․2구: “夷裔陵邊久, 文明運算高.” 北宋 외교정책의 고명함을 찬양한 것이다. 필자는 기존의 해설을 따른다.
③ 제3․4구: “三冬馳日御, 一夜隕星旄.” 眞宗의 澶州 親臨과 遼나라 장수의 사망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각각 沈遘의 〈信武殿〉 및 王安石의 五古와 七古의 〈澶州〉 두 수의 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④ 제5․6구: “從此通戎賂, 于今襲戰袍.” 澶淵之盟의 결과 遼나라와 교역이 이루어지고 전쟁이 종식되었음을 읊고 있다. 필자는 기존의 해설을 따른다.
⑤ 제7․8구: “威靈瞻廟像, 列侍冩賢豪.” 信武殿에 안치된 眞宗과 신하들의 초상화를 보고 그 모습을 찬양한 것이다. 劉敞이 〈朝謁信武殿二首〉에서 각각 眞宗과 寇準의 초상을 찬양한 점은 필자의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⑥ 제9․10구: “民獲耕桑利, 時無斥堠勞.” 평화의 결과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요나라에서 침공해 올 염려가 없어졌다는 점을 묘사했다. 필자는 기존의 해설을 따른다.
⑦ 제11․12구: “金繒比干櫓, 未損一牛毛.” 遼나라에 보내는 歲幣는 무기의 비용보다 훨씬 작다는 점을 강조하며 遼나라와의 평화관계를 찬양한 것이다. 필자의 의견은 기존의 해설과 같다. 단 “干櫓”를 中華書局本에서는 “千櫓”라 표기했고, 〈蘇頌使遼詩注釋〉에서는 “櫓”를 “望樓”로 풀이했지만, 그럴 경우 “櫓”는 제10구의 “斥堠”와 의미상 중복된다. 文淵閣本의 표기인 “干櫓”가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