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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논자가 앞으로 10여 년간 중점적으로 탐구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인 지 리산 유산기 연구의 試論이다. 논자가 진행해야 할 연구는 지리산권역을 중심 으로 한 조선조 지식인의 문학이다. 특히 조선조 지식인의 지리산 관련 遊山文 學과 영남・호남 지식인의 樓亭文學 작품을 주요 논의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山 水美學과 그 속에 융화된 자연관을 집중 탐구하고, 이의 전반적 이해를 통해 조 선조 지식인의 자연에 대한 이해,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모색하던 태도 를 밝혀내게 될 것이다. 본고는 그 첫 시도로써, 조선조 지식인이 지리산을 유 람하고 남긴 유산 작품을 대상으로 삼아 그 동안 발굴된 자료를 개괄하고, 작품 속에 내재된 그들의 산수인식을 고찰함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초기 李陸의 「智異山記」에서 시작된 지리산 유산기는 20세기까지 약 90 여 편이 발굴되었다. 이를 시대별로 분류하면 15세기 6편, 16세기 5편, 17세기 전반과 후반에 각 6편과 7편, 18세기 20편, 19세기 27편, 20세기는 21편인데, 후대로 갈수록 작품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작품 수의 차이는 조선시대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그에 따른 지식인들의 浮沈에 그 원인 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 유산기에 보이는 산수인식은 4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먼저 유산기 담당층이 조선조 유학자인 만큼 다양한 儒家的 志趣를 先賢尊崇으로 압축하여 살펴보았고, 다음으로 지리산 산수자연 가운데 佛家的・巫俗的 유적지를 통해 異端을 배척하는 지식인의 의식을 살펴보았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仙境을 찾는 그들의 遊仙 의식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그들은 지리산의 절경 속에서 道家的 志趣를 갈망하면서도 유학자로서의 자세 를 잃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유람을 통해 뛰어난 文學的 志趣를 표출해 내었는 데, 이는 우리 국토에 대한 예찬으로 일관되었음을 확인하였다.
        2.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遺逸은 16세기 조선조 사대부문학의 작자층 가운데에서 학덕이나 재능을 지 녀 朝官이 될 자질을 갖추고도 벼슬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하는 未入仕者를 말 한다. 士禍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근거지로 은거한 이들은 현실 을 외면하지 않고 끊임없는 학문연구와 심성수양을 통해 온전한 인격을 추구하 였으며, 향촌을 교화하고 도학을 전파하는 등 경색된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士 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적 비중과 신망이 조 정에서 벼슬하는 관료보다 더 높아져, 조정에서는 이들을 예우하여 徵召하였다. 곧 遺逸은 출사하지 않으면서도 지방에서 백성의 신망이 두텁던 당대 碩儒들로 서, 우리 역사상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시대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삶의 터전은 산수자연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은거지에 대한 애정이 남 달랐고, 은거지 주변의 명산과 절경을 유람하는 것으로 이를 표출하였다. 유람 에서 만나는 자연경물에 자신의 심정을 붙여 술회하였는데, 그들에게 있어 산 수자연은 ‘본래 그러한 것, 본래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했던 것’으로만 인식되지 않았다. 특히 16세기 조선조는 성리학 연구의 심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이 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성리학자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산수자연은 당대의 不正한 현실을 인식하는 자신의 의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특히 은거지 중심의 유람에서 표출되는 산수자연은 현실에서의 좌절을 수양으로 승화시키는 지식인의 의식세계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예컨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성리학자였던 만큼 자연경물을 통해 현실의 不 正 및 민생고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고, 역사유적지를 접하면 그 시대를 회고 하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현실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다. 무엇보다 물러나 있지만 자아를 각성하고 심성수양에 진력했던 이들에게 산수자연은 士意識을 고취하는 매개로 작용하였다. 곧 당대 관료세계에 피동적으로 편입되기를 거부 하고 물러났던 조선조 士人의 의식을 산수자연으로 표출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