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에서는 딸기의 생육 및 환경관련 데이터를 활용하여 딸기 재배 온실의 최적 환경 구현을 위한 시스템을 선정하고 생산성 향상에 대한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할 목적으로 서부 경남 지역 중 딸기 재배로 유명한 지역의 온실을 대상으로 현장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경상대학교 내에 딸기 재배용 테스트 베드 온실을 설치하여 연구를 실시하고자 본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재배농가의 연령대를 보면, 상대적으로 50대 및 60대가 가장 많았지만, 50대 이하가 27개 농가로서 전체의 약 67.5%정도이었고, 60대 이상은 32.5%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 재배경력의 경우, 10년 이하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30년 이상인 경우도 있었다. 대상농가 모두가 단동온실로서 대부분이 아치 형태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양액재배 농가가 약 75%정도로 토경재배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양액재배의 경우, 전체 농가가 고설재배를 하고 있었다. 단동온실의 폭, 측고 및 동고는 조사지역에 관계없이 각각 7.5~8.5m, 1.3~1.8m 및 2.5~3.5m정도 이었다. 서까래 간격도 0.7~0.8m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 고설재배의 경우, 고설재배 베드의 폭, 높이 및 간격은 각각 0.25m전후, 1.2m전후 및 1.0m전후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딸기 품종의 경우, 국산이 약 97.5%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 중 설향이 약 65.0%로서 가장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온실 내부 환경 요인으로 38개 농가가 온도와 상대습도만 계측하였다. 2개 농가는 최근에 국산 제품인 스마트 팜 시스템을 도입한 농가도 있었다. 양액재배의 경우는 양액제어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관비기를 사용하거나 환기 및 유동 팬을 사용하고 있는 농가도 있었다. 온습도 조절은 스마트 팜 시스템을 도입한 농가를 제외하고 약 85%인 34개 농가에서 측창이나 환기팬을 작동시키는 제어패널만을 이용하여 조절하였고, 수동으로 측창을 개폐하고 있는 농가도 10%정도인 4개 농가가 있었다. 보온 및 난방의 경우, 전체 대상 농가가 수막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 외에 필요에 따라 기름 및 전기보일러, 방열 램프 및 부직포 등을 병행하여 이용하는 농가도 다수 있었다.
소나무 및 굴참나무 임분의 지하부 탄소저장량과 영급 및 지역 간의 관계를 구명하고자 경남 서부 7개 지역(고성군, 하동군, 진주시, 산청군, 의령균, 하동군, 사천시)을 대상으로 각 영급별(Ⅲ: 평균 30년생;Ⅴ: 평균 50년생; Ⅶ: 평균 70년생)로 20 m × 20 m 크기의 조사구 18개소를 선정하였다. 선정된 조사구를 대상으로 2010년 10월 낙엽층 및 토양 0-50 cm 깊이의 탄소함량 및 저장량을 조사하였다. 토양 탄소저장량은 두 수종 모두 Ⅶ영급이 가장 높았으나 영급 간 유의적인 차이는 없으며, 낙엽층 탄소농도와 탄소저장량도 두 수종 모두 영급 간 유의적인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P>0.05). 지역별 토양 탄소저장량은 소나무 임분의 경우 진주시가 18.13 Mg C/ha로 가장 낮았고, 하동군이 143.72 Mg C/ha로 가장 높았으며, 굴참나무 임분은 의령군이 21.92 Mg C/ha로 가장 낮았으나, 사천시는 119.9 Mg C/ha로 가장 높아 지역 간 유의적인 차이가 있었다. 낙엽층 탄소저장량의 경우도 소나무 임분의 경우 의령군이 가장 낮았고 산청군이 가장 높았으며, 굴참나무 임분은 사천시가 가장 낮았고, 고성군이 가장 높아 지역 간 유의적인 차이가 있었다. 본 연구결과에 따르면 경남 서부지역 소나무와 굴참나무 임분의 지하부 탄소저장량은 영급보다는 지역 간의 차가 크게 기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 조사는 최근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새송이버섯 재배농가의 안정적 영농을 위해 재배사 설계, 시공 및 환경조절과 관련한 기초 자료를 마련하기 위해 서부 경남지역을 대상으로 새송이버섯 재배사의 재배사 규모, 환경조절시스템 등의 실태조사 및 검토를 하였다. 재배사의 형태는 반영구재배사와 영구재배사로 대별 할수 있었고, 반영구재배사는 대부분 단동이었고, 영구재배사의 경우는 단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동이 많았다. 그리고 재배사의 규모는 형태에 관계없이 다양하였지만, 길이, 폭 및 동고는 각각 20m, 6.6~7.0m 및 4.6~5.0m정도의 농가가 가장 많았으며, 동당 바닥면적은 132~140m2(40-42평)정도의 범위로서 대부분 콘크리트로 처리하여 각종 균에 의한 버섯의 오염을 방지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반영구 및 영구재배사의 지붕경사각은 각각 41.5˚ 및 18.6~28.6˚로 나타나 반영구재배사의 지붕경사도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재배상의 폭 및 단수는 재배사의 형태에 관계없이 각각 1.2~1.6m정도와 4단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버섯을 연중재배 하는 재배사에는 모두 냉·난방시설, 가습장치 및 환기팬이 설치되어 있었다. 난방방식의 경우, 온수보일러, 전기히터, 증기보일러 순으로 나타났다. 냉방장치의 경우는 모두 산업용 에어컨을 설치하여 운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습은 초음파가습기와 원심분리가습기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보조 장치로 분무노즐을 사용하는 농가도 일부 있었다. 또한 온·습도 조절 및 탄산가스 조절을 위한 장치의 제어는 동별 제어시스템을 많이 채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온도센서 이외는 모두 타이머를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배지병의 크기는 850 cc 및 1,100 cc를 사용하는 농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이 밖에도 800cc와 950 cc, 1,200 cc병을 사용하는 농가도 있었다. 출하형태는 대부분 유통회사와 공판장을 동시에 이용하고 있었다.
본 연구의 두 가지 목적은 서부경남지역 초등학교 급식환경에 대한 위생학적, 미생물학적 안전성 평가와 SSOP(Sanitation Standard Operation Procedures)실천을 위한 자료구축이다. 식수와 상수원수, 조리, 배식도구, 주변기구, 조리종사자와 조리된 음식으로부터 총 97개의 시료를 채취하여 일반세균, E. coli, salmonella, yersinia, vibrio parahaemolyticus staphylococcus와 같은 각종 병원성균에 대한 생화학적 분석을 하였다. 조사 결과 일반 세균수는 최저 1.0×10^2 CFU/mL에서 최고 1.0×10^7 CFU/mL로 식품 안전성 수준을 초과하였다. 특히 조리된 식품에 있어서는, 4곳의 가열 공정 과정을 거치지 않은 김치에서 1.0×10^5 CFU/mL 이상의 일반세균이 검출되었다. 전반적으로, B장소의 일반 세균수가 다른 장소들에 비하여 높았다. 또한 병원성 미생물 수준에 있어서는 C와 E 급식소의 칼과 E급식소의 김치에서 E.coli가 분리되었으며, A 급식소의 식수, D 급식소의 손, E 급식소의 냉장고와 앞치마에서는 황색포도상구균이 검출되었다. 반면 salmonella, vibrio와 yersinia는 어느 시료에서도 검출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학교 급식에서 일반 세균과 병원성 미생물이 존재하는 것은 위생 실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학교 급식소에서 이러한 미생물 오염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위생관리가 요망된다.
본고는 서부경남지역의 저명한 학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긴 조성가의 ..월고일기..를 통해 서부경남지역의 동학의 확산과 향촌사회의 대응을 살핀 것이다. 서부경남지역은 관리들의 탐학과 혹심한 가뭄으로 자주 민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호남지역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게 되었다. 1894년 4월 산청 덕산에서 백낙도 등의 동학교도들이 처형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7월부터 호남지역의 지원을 받아 덕산의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다시 활발하게 재개되었다. 동학농민군은 8월 19일부터 곤명의 봉계와 진주의 마동 일대에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동학농민군에 비판적인 사족들을 체 포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9월 초 섬진강을 건너온 순천, 광양의 영호도회소나 구례 등지를 거쳐 남원 등에서 온 호남지역 농민군과 함께 하동,진주, 사천, 곤양 등지를 동학농민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폐정개혁과 왜적의 침 입을 막아낸다는 명분하에 대규모로 집결하였기 때문에, 진주 병영이나 관아에 서도 동학농민군의 기세를 막아 낼 수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관군과 일본군이 합세하여 서부경남지역 동학농민군을 공 격하게 하였다. 그 중 가장 큰 전투는 10월 14일 전개된 하동의 고성산성 전투 였다. 동학농민군은 전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무기와 전투기술 에 눌려 끝내 동학농민군은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어 이곳에 관군이 진격하 고 진주 우병영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종식되게 되었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맞서 경상 우병영에서는 각 지역의 사족들을 군무 참모관으로 임명하고, 지역별로 성첩을 수리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각 지역별로 요호(饒戶)를 대상으로 군무참모관을 뽑아 향회를 개최하고, 성첩 을 수리하고, 군기를 보수하였으며, 군량을 확보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당시 사족들은 경상우병영의 대책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으나, 어쩔 수 없이 자금을 제공하고, 군무에 종사할 수 밖에 없었다. 각 마을에서는 오가작통제를 강화하고 산에 보를 축조하였다. 오가작통제는 경상감영의 지시로 실시되었는데, 각 洞에 오고가는 자를 살펴서 수상한 자취 가 발견되면 통수→두령→통장→영수→관아→감영으로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 었다. 보는 진주 우병영의 지시로 단성이나 옥종면 일대의 산에 많이 축조되었다. 월횡리에서 축조한 사림산 보의 경우, 보의 축조에 마을 사람 전체가 동원되었 다. 마을 사람들은 산의 정상에 성문을 축조하고 보 안에는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집을 지었다. 그리고 식수원과 연결하는 길을 내었다. 그러나 이 보는 땅 이 좁아서 마을 사람들이 거주하기 불편하였고, 동학농민군의 신속한 공격에 맞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오가작통이나 보의 축조에도 불구하고, 마을에서는 동학농민 군에 가담한 인물이 점차 늘었다. 월횡리에는 최소한 두 개 이상 동학농민군 조 직이 있었으며, 10월 초 일본군이 진격해옴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동학농민군 에 강제 징집되었다. 대부분 탈출하였으나, 상당수가 동학농민군을 따라 백곡, 수곡, 북평을 거쳐 이동하였으며, 고성산성 싸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고성산성에서 패배함에 따라 전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죽거 나 피신하였으며, 월횡리에는 도인과 속인의 조사가 시작되면서 동학농민혁명 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