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江이 활동하던 시대는 倭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의 난리가 있었고, 조정에서는 黨爭으로 인한 정치적 다툼으로 인해 정치 ․ 사회적으로 혼란이 극심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西人의 우두머리로서 정치에 몸담았던 송강은 黨派로 인한 답답한 심정과 謫所生活에서 겪는 고민을 해소하고자 도연명이 자연을 벗 삼아 참신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던 田園閑居 생활을 흠모하고, 그의 영향을 받아 自然憧憬의 시를 읊었다. 송강은 도연명처럼 자의적으로 歸去來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타의에 의한 謫所生活에서 出仕에 대한 의욕을 잃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임금의 은혜로 謫所에서 풀려나 정계에 복귀되어 좌의정이라는 높은 벼슬에까지 오른 것은 도연명이 자의적으로 전원에 歸去來한 후 다시는 조정에서 불러도 정치에 뜻을 두지 않은 出處觀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임금에 충성하고 經世濟民에 뜻을 두었던 16세기 조선 士林들의 出處觀과 송강도 같이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편 도연명은 政治道義가 상실되어 不義한 방법으로 신하에 의해 왕위가 찬탈되어 晉에서 宋으로 나라가 바뀌자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물러나 숨는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와 달통하면 나서서 천하를 구제하고,막히면 할 수 없이 물러나 자신을 착하게 한다.(達則兼善天下,窮則獨善其身.)라는 儒家의 관념에 出處觀을 두었고, 송강은 맹자가 말한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 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生, 亦我所欲也. 義,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에 出處觀을 두어 經世濟民하고자 끝까지 벼슬에 대한 집착을 하였다. 이를 보면 兩人의 出處는 儒家의 가치관에 의해 정했다는 것이 相似點으로 나타났다. 松江은 당시 黨爭으로 인한 정치 현실에서 고뇌를 해소하고, 謫所생활에서의 위안을 얻는 데는 술만큼 좋은 媒介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도연명이 憂愁를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는 점과 일치한다. 도연명은 비록 다섯 편의 시에서 짧은 시구로 국화사랑의 시를 표현하였으나, 周濂溪가 그의〈愛蓮說〉에서 국화는 꽃의 은일자다.(菊, 花之隱逸者也.)라 말하고, 晉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다. (晉陶淵明獨愛菊)라고 말하여 도연명의 국화사랑을 특별히 부각시킨 이후 송강도 菊花하면 도연명이 동쪽 울타리 밑에 심었던黃菊을 연상하였고, 국화를 통해 名利로부터 탈속하여 선비로서의 고결한 자태를 보여준 도연명을 국화사랑의 대표자로 생각하며 존경과 흠모하는 시를 읊었다. 田園은 생명의 근원이 샘솟고, 자연의 숨결과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며, 순박하고 다정다감한 정서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에게 勤勉과 休息을 주는 최후의 安息處이기도 하다. 도연명은 일반 전원시인들과는 달리 그의 시에서 田園에 대한 讚美와 함께 몸소 전원에서 躬耕한 체험을 바탕으로 田園의 생명력이 솟구치는 활기찬 정경을 읊어 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에 松江도 도연명이 읊은 시구와 典故를 援用하여 도연명의 田園閑居에 대한 동경의 시를 지었다. 陶淵明이 만년에 쓴 〈桃花源詩幷記〉는 晋 ․ 宋年間에 민중들이 정치의 災禍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이상사회를 추구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人口에 膾炙되어 왔다. 이 작품은 간결한 언어와 뛰어난 造語力으로 순박하고 화목한 농촌사회를 이상세계로 삼아 老子의 ‘小國寡民’ 이나 儒家의 ‘大同世界’ 이념을 잘 형상화하여 혼란시대에 처한 인간들의 간절한 희망을 반영시켰다. 도연명의 이상향인 桃源世界는 신선이 사는 세계가 아니라 포악한 秦의 난리를 피해 漢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 그 뒤로 魏나라 晉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면서 조상에 제사지내고, 손님에게 닭을 잡아 술을 대접하는 다정다감한 情感과 불 때서 밥해 먹는 인간사회의 정황을 묘사하였기에 松江도 도연명이 묘사한 儒家的 관념의 桃源世界를 갈망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운명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도연명은 죽음으로부터 해탈하고자 不老長生을 추구하는 道家나 靈魂不滅의 佛家에도 관심을 가져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宿命的인 죽음을 해결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은 그는 儒家的인 自然歸依觀에 최후의 몸을 맡겼듯이 송강도 도연명처럼 儒家的 삶의 방식을 추구하다가 그의 생을 마쳤다. 결국 兩人은 1200년 가까운 시대적 차이와 각기 다른 국가에서 다른 정치 ․ 사회의 풍파를 겪으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갔지만, 兩人의 자연사랑과 은일관념은 儒家的 관념으로 불후의 전원시가 문학을 창작한 것이 일치하며, 兩人의 문학세계는 후대 시가 문학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송강 정철(1536~1593)은 조선시대 중기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위정자이자 문인이기도 하다.당시의 시대상황은 사화(1544)와 당쟁,그리고 임란(1592)등으로 혼란했던 시대였다.정철은 이러한 사회상을 배경으로 처절했던 삶의 체험을 대자연의 관계 속에서 형상화 내어 독창적인 창작세계를 구축해 많은 작품을 남겼다.본고는 송강 한시의 자연관의 연구의 일면으로 그의 삶의 체험에 의한 사상과 감정의 주관적인 세계가 자연물에 대한 객관적인 대상의 실경보다 그의 주관적인 심회에 치중하여 시적 형상화한 심미적 특징을 검토하였다.그의 한시에 나타난 자연물 중에 운과 월,강과 산,꽃과 나무,새 등이 주요 소재로 다루어졌다.연군의 상징적 의미로 시적 형상화된 자연물은 달,산(봉래산․종남산),물(한강)이며,연군을 향한 충정의 상징된 시어는 해와 학,그리고 매화가 표현되었다.벗과의 별리의 상징의 자연물은 대나무․소나무․연꽃에서 나타난다.송강의 은거의 처지가 상징된 자연물은 백운․벽운 등의 구름과 매화․난초․국화의 꽃과 학․갈매기․기러기 등의 새,그리고 대나무․소나무․잣나무 등의 나무에서 우국충정과 송강의 깊은 심회에 대한 외로운 신하의 애절한 정을 표현하고 있었다.한시에 나타난 자연물들은 대부분이 직관에 의한 즉흥즉사로 표현한 것이 많았다.이는 대자연의 관계에서 객관적인 대상보다 주관적인 심회가 유정화된 창작특징으로 나타났다.당대 문학창작의 조탁의 진통을 통한 단아완숙한 창작세계와는 다른 독특한 한시세계의 특질과 의의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따라서 송강의 한시는 조탁되지 않은 즉흥즉사의 창작세계였지만 그만의 진면목이 그대로 표출되는 역동적인 기운생동의 미적특질을 지닌 독특한 창작세계로 이후 국문시가의 창작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碧珍 李氏 가운데 密陽 來進 門中의 경우 조선 중기 이후 후기에 들어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여러 대에 걸쳐 문집이 이어져 나오고 벼슬도 이어졌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문중이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중간에 東巖 李而樟과 松岡 李命徵 부자의 효우 돈목의 정신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동암은 아버지 秉節公 李繼胤으로부터 ��小學��의 실천궁행의 정신을 받아 위로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는 五友堂을 지어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고 자질의 교육에 힘썼다. 그 결과 중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재자들과 교유를 확대하는 등 도약의 단계에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함께 서울에 머물던 셋째 아우 李而相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세상에 나아가는 일을 단념하였지만 그 후유증으로 일년 만에 자신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동암의 시는 그의 생애를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동암은 그리 많은 시를 남기지는 않았고, 시도 輓詞가 위주이지만 시작품들은 비교적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만시는 여러 작품들이 거의 일관되게 자신만의 독특한 구조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어 하나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抒情詩와 交遊詩는 그리 많지 않으나, 시 속에 절제된 감정이 잘 스며들어 있다. 송강은 아버지 동암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많지 않은 나이에 조부모와 어머니, 그리고 여러 명의 삼촌을 모셔야 할 뿐만 아니라, 아래로는 처자와 형제를 돌보아야 하는 막중한 일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벼슬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간에 환로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과거를 포기하였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효우와 돈목을 매우 중시하여 一家契를 조직하였으며, 12說을 지어 유자로서의 기본에 충실하고자 하였다.송강의 시도 그의 생애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의 시는 아버지의 것에 비해 양적으로 많으며, 내용에 있어서도 아버지에 못지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는 벗과 주고받으며 우의를 다진 交友詩, 자신과 동갑인 숙부와 벗처럼 주고받은 唱酬詩, 고향의 산천에 대한 자부를 드러내거나, 특히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思鄕詩 등등의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이들에 대한 연구는 동암과 송강 부자 각각의 삶과 사상을 살피고 시를 통하여 이를 확인하는 것 이외에 벽진 이씨 내진문중이 흥왕하게 한 원천이 무엇이었던가를 이해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