履齋 宋鎬彦은 한말 경남 삼가군의 학자인데, 그는 南冥 曺植과 退溪 李滉에 대한 인식에 있어 매우 흥미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남명의 고향과 같은 지역에 살았고, 학문적으로는 尹冑夏, 李震相, 郭鍾錫 등에게 배워 퇴계의 학맥에 닿아 있었다. 그의 문집에 보이는 남명과 퇴계의 인식에 있어 이러한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는 작품들이 있는데, 특히 남명에 대해서는 남명 사상의 핵심이라 할 경의를 상징하는 敬義劍을 읊은 「南冥先生古劍歌」와 퇴계에 대해서는 한주 이진상이 부르짖은 祖雲憲陶가 새겨진 옥사자인을 읊은 「玉獅子印歌」를 들 수 있다. 두 작품 가운데 「남명선생고검가」는 경의검을 통해 남명의 사상을 읊은 것이고, 「옥사자인가」는 옥사자인을 통해 한주 이진상이 퇴계의 학맥을 계승한 것을 읊은 것으로, 바로 남명과 퇴계를 대비시켜 논한 것이 아니라서 두 작품이 긴밀한 연관성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옥사자인가」에서 송호언의 퇴계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는 있다. 이재의 남명에 대한 생각은 남명의 제자들에 대한 시, 특히 삼가군수로 부임한 申斗善이 雷龍亭을 중수하면서 이재에게 명하여 지었던 「雷龍亭詩」에 잘 드러나 있다. 「뇌룡정시」에서 그는 인을 회복하여 乾道를 성실하게 하는 것은 군자가 바라는 것인데, 이를 실행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하며, 남명이 바로 千仞壁 立의 기상을 가지고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의연함이 있다고 칭송하였다. 「남명선생고검가」는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장편 고시인데, 그는 첫 번째 단락에서는 역사가 깊은 칼을 남명이 지리산에서 갖고 있는데, 이는 하늘의 뜻 으로 없애고자 해도 없앨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남명이 그의 敬義劍을 가지고 세상의 일들을 처리하였다면, 온 세상이 밝고 정의로운 경과 의가 넘치는 세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남명은 결국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지니고 있던 칼이 남아 있으니, 후대 사람들은 경의 뜻을 담은 여덟 자의 내용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재의 퇴계에 대한 인식은 이재가 퇴계의 시에 차운한 3제 4수의 시에 잘 드러나 있다. 雙明軒의 차운시는 퇴계가 한 때 거처하던 장소에서 퇴계를 생각하고 그 서글픈 심회를 노래한 것이고, 四樂亭 차운시는 사락정의 모습과 그곳에 깃들어 있는 퇴계의 자취를 읊었는데, 퇴계를 사모하여 도의 眞諦를 그에게 묻고자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을 노래한 것이다. 특히 「옥사자인가」는 「남명선생고검가」와 마찬가지로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장편 고시인데, 그는 첫 번째 단락에서는 주자의 학문이 퇴계로 이어진 것을 寒洲 李震相이 계승하였음을 여러 고사와 비유적인 내용을 통하여 드러내어 주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사자를 그려 자신의 학문을 전하였기에 사자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 되었지만, 꼭 그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혔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후학들에게 해야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경계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퇴계에 대해서는 남명에 대한 것만큼 현실적 실천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고 다만 후대의 학자가 부르짖는 ‘祖雲憲陶’의 주체로서 주자로부터 조선후기 이진상에게 이르기까지 그 학문의 정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였다.
이 글은 無何堂 洪柱元 한시의 내용과 형식의 특질, 그리고 표현방식의 특징적 면모에 대해 살펴보려는 것이다.
무하당 한시의 내용적인 특질로서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輓詩가 다른 사람의 경우에 비해 훨씬 많다는 것과 내용과는 상관없이 형식상 특이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서는 대작이 많이 보이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만시는 다른 사람들의 문집에도 흔히 보이는 것이지만, 무하당의 경우 양적으로 많을 뿐만 아니라, 특히 국왕이나 왕비, 공주 등 왕실의 인물들에 대한 만시, 더 나아가서는 왕실과 관련이 깊은 여러 인물들에 대한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사람이 죽었을 때 지은 것 이외에 묘를 옮길 때 지은 遷葬輓詩도 제법 있음을 볼 수 있다.
대작은 고관대작을 위하여 지은 것도 있지만, 일반사대부나 혹은 아녀자들을 위하여 지은 것도 있다. 그리고 고관대작을 대신하여 지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지만, 자신의 아우나 매형 등을 대신하여 지은 것도 있다. 누구의 대작인 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특히 자신의 매형인 李時述을 위하여 지은 것처럼 이름이 드러난 경우도 있다.
무하당 한시의 표현방식으로서의 특징으로는 첫째 대립적인 뜻으로 형성된 단어의 사용이 눈에 많이 띄며, 둘째는 한 인물을 용사하여 이끌어다가 씀에 있어 반복적일 뿐만 아니라 복합적으로 다양하게 사용하였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대립적인 개념어의 사용은 存亡, 存沒, 生死, 幽顯, 去住, 昇沈, 憂寧 등 특히 죽음과 이별에 당면하여 지은 시에 특히 많이 보인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개념을 병렬하여 드러냄으로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더욱 강하게 나타내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용사의 복합적인 사용은 晉나라 때의 문인 潘岳에 대한 용사에서 두드러진다. 반악은 한시에서 지방관을 하며 어머니를 板輿에 모시고 명승을 구경시킨 효자, 미모와 함께 32살에 일찍 센머리가 나 더욱 드러나는 老病, 河陽의 도리화로 대표되는 善政, 아내가 죽었을 때 지은 「悼亡詩」에 드러난 슬픔, 「秋興賦」에 드러난 가을의 서글픈 서정 등 여러 가지 면모로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碧珍 李氏 가운데 密陽 來進 門中의 경우 조선 중기 이후 후기에 들어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여러 대에 걸쳐 문집이 이어져 나오고 벼슬도 이어졌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문중이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중간에 東巖 李而樟과 松岡 李命徵 부자의 효우 돈목의 정신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동암은 아버지 秉節公 李繼胤으로부터 ��小學��의 실천궁행의 정신을 받아 위로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는 五友堂을 지어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고 자질의 교육에 힘썼다. 그 결과 중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재자들과 교유를 확대하는 등 도약의 단계에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함께 서울에 머물던 셋째 아우 李而相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세상에 나아가는 일을 단념하였지만 그 후유증으로 일년 만에 자신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동암의 시는 그의 생애를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동암은 그리 많은 시를 남기지는 않았고, 시도 輓詞가 위주이지만 시작품들은 비교적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만시는 여러 작품들이 거의 일관되게 자신만의 독특한 구조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어 하나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抒情詩와 交遊詩는 그리 많지 않으나, 시 속에 절제된 감정이 잘 스며들어 있다. 송강은 아버지 동암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많지 않은 나이에 조부모와 어머니, 그리고 여러 명의 삼촌을 모셔야 할 뿐만 아니라, 아래로는 처자와 형제를 돌보아야 하는 막중한 일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벼슬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간에 환로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과거를 포기하였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효우와 돈목을 매우 중시하여 一家契를 조직하였으며, 12說을 지어 유자로서의 기본에 충실하고자 하였다.송강의 시도 그의 생애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의 시는 아버지의 것에 비해 양적으로 많으며, 내용에 있어서도 아버지에 못지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는 벗과 주고받으며 우의를 다진 交友詩, 자신과 동갑인 숙부와 벗처럼 주고받은 唱酬詩, 고향의 산천에 대한 자부를 드러내거나, 특히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思鄕詩 등등의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이들에 대한 연구는 동암과 송강 부자 각각의 삶과 사상을 살피고 시를 통하여 이를 확인하는 것 이외에 벽진 이씨 내진문중이 흥왕하게 한 원천이 무엇이었던가를 이해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孤臺 鄭慶雲의 시문학에 대한 연구이다. 고대는 孤臺日錄이라 는 비교적 많은 양의 일기를 남기고 있으나, 정작 그의 시문을 수록한 문집 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남긴 시문으로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그에 대한 연구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시문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까닭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고대일록과 그의 주변의 인물들, 특히 사우관계에 있 던 사람들의 문집을 살펴보면, 그의 시문학에 대한 정보를 제법 얻을 수 있 다. 우선 고대일록을 보면 그가 생활 속에서 시문을 일상화하였던 자취를 엿볼 수 있으며, 일부 시를 볼 수 있고, 특히 많은 문장을 접할 수 있다. 그리 고 시는 그의 스승인 鄭仁弘의 문집에 여러 작품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대의 시는 스승의 학덕과 행실을 읊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가운데에 는 벗과 주고 받은 시, 벗을 만나 그 감회를 읊은 시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특 히 스승을 읊은 시는 현실(소인), 스승, 국왕이라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시의 구조에는 그의 시의 지향이 담겨 있다. 고대는 이러한 시들을 통하여 그가 추구하는 정치적 이상을 표출하였다. 산문은 알려진 것으로 感樹齋 朴汝樑에 대한 제문 1편에 지나지 않았으나, 고대일록에는 완전한 산문으로 전하는 것만도 11편이 있고, 산문으로 볼 수 있는 글들이 여러 편 남아 있다. 그는 산문을 지음에 후대에 남기려고 하 는 저술의식을 뚜렷이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문 가운데에서는 시에서 보다도 더 강력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특히 절개를 지키는 일에 중점을 두어 의도적으로 글을 지었는데, 바 로 「牡丹側柏說」과 「硯子說」이 그것이다. 모란 측백은 모란과 측백을 의인 화하여 대화체를 통하여 모란의 화려함보다는 측백의 절조가 중시되어야 함 을 이야기하였고, 「연자설」은 벼루에 새겨진 소무의 일을 통하여 절조를 강 조하고 조정에 이런 사람이 등용되어야 한다는 소망을 피력하였다.
이 글은 大笑軒 趙宗道의 문학에 대한 생각과 문학작품 특히 시세계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대소헌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 安奇道察訪에 천거되었고, 그곳에 있으면서 退溪 李滉의 제자인 柳成)·金誠一·權好文 등과 교유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을 하였고, 정유재란 때 黃石山城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는 호에 드러난 바와 같이 매우 호방하였으며, 성품과 행실이 고상하고 우뚝하였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친척들에게 어질게 대하고, 벗들에게는 진심으로 대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성품과 행실은 문학에 그대로 나타났는데, 문학에 대하여는 매우 실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學校」라는 일종의 策文에서, 학교는 문학을 詞章을 외워 科擧에 합격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선현의 덕을 함양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문학보다는 학문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은 매우 뛰어났으며 여러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대소헌의 문학작품이 갖는 가치는 우선 문학작품은 그 사람의 인물됨됨이를 반영한다는 매우 오래된 생각을 바탕으로 발현이 되고 있다. 이는 공자와 맹자에게서 비롯된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한다.[有德者 ,必有言]’이나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모르면 되겠는가?[誦其詩, 讀其文, 不知其人, 可乎?]’라는 말을 기초로 하여, 사람됨됨이[爲人]와 시를 짓는 것[爲詩] 혹은 글을 짓는 것[爲文]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사람됨됨이와 시를 짓는 한 것은 한 가지’라는 ‘爲人爲詩一道論’에 근거하여 선현들은 대소헌의 시가 그 인물과 마찬가지로 매우 훌륭하였음을 말하였다.
대소헌의 문학작품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오래된 논점의 하나는 ‘고기 한 점만 맛보면 솥 전체의 맛을 알 수 있다’는 ‘一臠全鼎可知論’이다. 이는 한 점의 저민 고기로 한 솥의 국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인데, 한 국자의 맛으로 전체 솥의 맛을 알 수 있다는 말과 같이 쓰이고 있다. 大笑軒 趙宗道가 남긴 얼마 되지 않는 작품을 보면 그의 작품이 진실로 ‘일련전정가지론’에 부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岳堅山城에서 지은 시와 玄蘇에게 주는 시는 그 대표적인 예이며, 그 밖의 작품들도 여러 선인들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性情과 氣格을 드러내는 뛰어난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의령지역을 대표하는 학자 西岡 李中厚의 생애와 시세계를 다룬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張福樞의 문하에서 학문을 하였으나 중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공부를 하지 못하고 건강의 회복에 힘을 썼다. 그는 요양에 집중하는 동안에 다른 한편으로는 근검절약하여 가산을 모았고, 부친의 유명에 따라 종족이 돈목하게 지낼 방책으로 別莊을 지어 집안의 大小事를 의논하고 도왔다. 이렇게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집안을 일으키는 데에 평생의 심력을 다한 그에게 자제들이 별장 곁에 西岡精舍를 지어주었다. 그는 만년에 이곳에서 그간 하지 못한 공부를 다시 하면서 집안을 다스렸는데, 무엇보다도 이곳에서 자제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가업을 일으켜 주기를 바랐다.
그는 이처럼 질병과 가산을 모으는 일에 힘을 썼지만 선비로서의 도리는 잊지 않아 인근의 지인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지은 輓詩가 100여 편에 이르고, 또 공부하고 요양하는 여가에 벗들과 모여 명승을 찾아 즐기기도 하였는데 이 때 한편으로는 술을 마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시에 전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는 상당히 수준에 이르러 그와 절친하게 지내던 深齋 曺兢燮이 시에는 情來·氣來·神來의 三來가 있는데 그의 시는 이것을 거의 이루었다고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시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輓詩는 일반적인 만사와는 달리 자신의 슬픈 감정과 마음을 드러내기 보다는 고인의 생애를 정리한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어떤 시는 만시라기보다는 고인의 일생을 정리한 誄詞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 것이 많다.
반면에 次韻詩는 다른 사람이 지은 시를 따라서 짓는 제약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서정적인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많다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남명의 생애와 발자취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오래 되었다. 어찌 보면 남명 당대에도 이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남명이 돌아간 직후 이에 대한 정리가 본격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남명의 생애 가운데 예민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제자 정인홍의 정치적 부침에 따른 후유증으로 생애에 관한 자료도 여러 차례 여러 사람에 의해 중복하여 지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남명에 대한 생애자료는 그 누구보다도 많이 남게 되었다.
근대에 들어 남명의 생애를 정리하여 소개하는 일에 그리 적극적이지 못하였다. 근대의 인명사서 등에 남명에 대한 내용은 비슷한 시기의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략한 감이 있다. 1990년대 초에 남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남명의 생애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본격적인 연구와 번역, 교정 등은 이루어지 않았다. 다만 최근 들어 다행스럽게 남명에 관한 생애자료가 다시 전반적으로 검토되고 정리되고 있다.
남명의 생애에 관한 정리와 소개, 교정과 연구는 논문, 저서, 소설, 사전, 교과서 및 개설서 등 여러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소설로 지어지고 교과서 및 개설서에 소개되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논문, 저서 등의 형태로 점점 깊이 있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인터넷 온라인상에 사전적 설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남명의 생애에 대한 철저한 실증을 바탕으로 생애가 정확하게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남명의 발자취에 관한 정리와 소개는 주로 책으로 몇 권 나와 있는데, 개설적으로 간략히 설명한 것에서부터 특정한 분야 예컨대 한시 등과 관련하여 발자취를 탐방하는 형식으로 된 것도 있다. 그리고 그의 생애의 발자취와 학문적 궤적을 관련지어 연구한 것도 있다. 이들 발자취에 대한 정리와 탐구는 이전의 유적지에 대해 소략하게 소개한 책자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였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발굴하거나 정리가 되지 않은 발자취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文劼은 어려서부터 문명을 떨쳐 소년시인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뛰어난 시 작 품을 남겼고, 정유재란에 하수일과 의병을 일으켜 하동의 악양에서 활동함으로 써 이들 덕분에 이 지방이 온전하였다는 평과 조정의 상을 받기도 하였다. 文弘 運은 아버지를 따라 악양에 있다가 아버지가 병사함에 전란의 와중에서도 장례 를 치루고 그 이후로는 유거하며 지냈으며, 그가 남긴 「頭流八仙遊篇」은 지리 산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頭流八仙遊篇」은 문홍운 자신을 비롯하여 성여신, 정대순, 강민효, 박민, 이 중훈, 성박, 성순의 여덟 사람이 성여신의 제의에 따라 두류산을 유람한 과정과 느낌을 읊은 시이다. 이 시는 지리산 유람을 노래한 여러 시편 가운데 가장 긴 것으로 240구 1,200자에 이르는 장편 5언시이다. 특기할 것은 성여신의 「방장 산선유일기」 가운데에도 보이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시의 제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리산으로 유람을 떠나는 여덟 사람을 신선이라 부른 것이다. 선비들이 자신들이 유람을 가는 곳을 신선세계라 하며, 그곳을 속세와 구분하 여 마치 신선세계에 오른 듯이 그 감회를 기록한 것은 있지만, 유람 가는 자신 들을 신선이라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인에게 신선의 이름을 이처럼 지어붙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만큼 이들의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이 컸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의 이러한 신선놀이는 또한 한 번의 일회적인 유희에 그치지 않고 유람하 는 동안 내내 이어졌음을 성여신과 문홍운의 글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여신이 “속에 들어가서는 눈에 띄는 사람 모두 선인이었고, 산 밖으 로 나와서는 만나는 사람 모두 범인이었다.”라고 한 바와 같이 이들의 이러한 신선놀이는 결국 유자로서 신선에 인식의 테두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 다. 문홍운이 지리산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과 예찬이 극 에 달하였지만, 막상 그가 지리산에 당도한 뒤 특히 지리산 청학동이나 향로봉 에 올라 읊은 평범한 시구는 그러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문홍운은 그의 시에서 청학동이나 향로봉에서 신선세계에 당도하여 신선을 보았다고 했으나, 이는 보통 사람들의 신선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문홍운의 신선놀음도 결국은 성여신이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의 선유는 이름은 비록 ‘仙’이나, 실제는 ‘仙’이 아닌 것 이다.”라고 한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단파 하계룡의 학행과 그의 시세계를 살펴본 것이다. 단파 하계룡은 세상에 크게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이렇다 할 벼슬을 한 것도 아니고, 남긴 약간의 저술이 단파유고라는 이름으로 후손에 의해 정리되어 출간된 것 이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삼불후 가운데 벼슬을 뺀 치와 덕을 누린 사람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당대의 대표 적 학자인 정재규와 권재규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가 당시에 이러한 평가를 받았던 까닭은 그의 선조 창주와 습정재로부터 물 려받은 가학, 그 가운데에서도 효성을 깊이 본받았고, 또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에서부터 이어져온 학문, 그 가운데에서도 실천적 행실을 배운 때문이었 다. 그래서 그는 집안에서는 위로 선조와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아래로 친족 과 자손들에게 돈목과 우애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향촌의 인사들에게 존모를 받았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일생과 삶의 지향은 그의 많지 않은 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첫 째는 과거가 자신이 갈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공령을 버리고 학문을 좇았 던 일을 노래한 것이고, 둘째는 자신의 부모형제와 선조가 있는 고향에 대한 그 리움을 노래한 것이다. 셋째는 효를 실천하는 차원에서 일생 심력을 기울여 추 진했던 선조에 대한 추념을 노래한 것이고, 넷째는 같은 선조 아래에서 우애 있 게 지내기 위해 노력하던 마음이 담긴 친족 간의 화목을 중시하던 뜻을 읊은 것 이다.
이 글은 만성이 그의 시에서 어떠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심은 그의 어떠한 생각이 반영된 것인가를 살펴본 것이다. 만성은 그의 시에서 역사와 현실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의 참모습을 찾으려 애 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러한 것은 그의 도문일치에 입각한 그의 문학관에 기 초하고 있다. 일반 사대부들도 문학에 대하여 그와 비슷한 생각을 피력한 바 있 다. 그러나 그들의 문학관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매우 단편적이거나 편의적 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잡록 부분에서 잠간 언급하거나, 청탁에 의해 짓는 개인 의 문집 서와 발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매우 체계적으로 문 학론이나, 문론 혹은 시론이라는 글을 지어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문학에 대한 견해를 정리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또 생각에만 머물고 그의 문학 세계에서 그의 문학에 대한 생각을 구현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만성은 문학관에 대해 피력한 글이 많지는 않으나, 최장한・곽종석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문학관을 일목요연하게 사적 체계를 세워 정리한 것을 볼 수 있 으며, 이러한 문학관은 그의 많지 않은 시작품 속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올바른 인간에 대한 관심과 수양은 그의 몇 몇 잡저들 예를 들면, 「명덕 설」, 「위인론」, 「입지설」 등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은 그의 시 속에서 나란히 읊어진 한유한, 정여창 등 선현에 대한 그의 생각과 남명에 대한 생각, 그리고 당대의 어진 사람들과의 교제를 읊은 시 등에서 발현되어 있다. 그가 매 화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 특히 납매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과 이를 바탕 으로 지은 「납매설」은 그의 참된 인간의 모습을 탐구하고 현시하려한 의도를 읽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인간이 속해 있던 그리고 속해 있는 시간과 공간에 관심 을 가지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는 역사를 회고하고, 또 시사를 걱정하고, 민속에 관심을 기울이는 등 그가 속해 있는 현실의 과거와 당대에 깊 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만성의 시문학에는 자신의 시대와 그 시대를 열어가는 당대의 바람직 한 인물들과 깊은 교유를 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바로 그의 과거와 과거의 인물 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만성이 바라보는 현실은 없어져야할 대상이 아니고, 보존하고 안존하 고 싶은 곳이다. 시사를 걱정하는 것도 현재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걱정 해서이다. 그래서 그의 현실에 대한 인식은 심각한 문제를 찾아볼 수 없다. 다 만 미래의 불안과 걱정이 있을 따름이다. 미래의 불안과 걱정은 바로 굴욕적이 고 처참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예측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과거는 현재를 보 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미래를 보는 거울인 것이다. 인물의 경우에도 사람을 평가하는 바람직한 기준이 무시되는 현실을 매화를 통하여 비유적으로 이야기하고, 현실 속에서 그러한 인물들을 모색하였으며, 과거에서는 그러한 바람직인한 인물들이 어떻게 살았던가를 인식하고, 현실의 인물들에 교우를 유지하였다.
남명 조식은 자신에 대해서는 실천적 행실을 무엇보다 강조하였고, 대물에 대 한 관점은 실용적 측면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의 문학에 대한 태 도에 있어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문학을 대하여 서도 실용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는 젊었을 적에 한 때 문학으로 이름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나, 성인의 학문 을 자신이 공부할 목표로 정한 뒤로부터는 문학을 멀리하였다. 그는 스스로 시 는 완물상지하기 쉬우므로 배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그의 제자 정인홍에 따 르면 그는 항상 시황계를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남명이 이처럼 시를 배격하였다면 그의 문집에 시가 있을 수가 없을 것이지 만, 그의 문집에는 많은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시 벽이 있어 시를 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고 하였다. 남명은 결국 시를 멀리 하면서도 시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물론 시흥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지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바로 실용적인 목적으로 시를 지었던 것이 다. 특히 문장의 경우에는 이른바 문예문에 속하는 글도 전혀 없지는 않으나, 많은 작품들이 실용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처럼 실용성에 근거하는 남명의 문학관은 작품 속에서 대략 세 가지 정도로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본성이나 바탕과 같은 근본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는 「원천부」에서 온 갖 이치가 모두 본성에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작품을 지음에 있어서도 이 러한 생각은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둘째는 현실과 일상과 같은 현재를 중시하는 것이다. 그가 「을묘사직소」와 「무 진봉사」에서 드러낸 것과 같이 작품 속에서 현실과 일상을 중시하는 생각은 다른 산문에서 뿐만 아니라, 몇몇 시 속에서도 이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셋째는 사실을 중시하고 허명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가 사실을 중시하였던 점 은 그의 작품 속에서 그가 스스로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특히 묘문을 지으면 서 그는 고인에게 아첨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훌륭한 학자라는 빈 이름으로 세상을 속인다는 생각을 여러 작품 속에서 밝힌 바 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남명의 문학작품 속에는 그가 문학을 멀리하면서도 왜 작품을 짓지 안 되었는가 하는 사실과 문학작품을 지음에 있어서 무엇을 강 조하였는가, 그리고 문학작품 속에 드러난 것을 통해서 그가 무엇을 중시하였 는가를 살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것이 결론적으로 그의 실용주의적 생각과 맞 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글은 조위의 학문연원과 시세계 가운데 특히 조위가 김종직 문하에서 차지 하고 있던 위치와 무오사화를 전후로 하여 달라지는 시세계의 두 국면을 중심 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조위의 이복누이가 김종직에게 시집을 감으로써 조위는 김종직과 처남ㆍ자형 의 지친이 되었고, 이것을 인연으로 김종직의 제자가 되어 도학을 강론하였으 며, 김종직이 죽은 뒤에 그의 처남이며 문집을 수찬하였다는 이유로 갑자사화 때에는 김종직과 마찬가지로 천양지화를 당하였다. 당시에 수많은 제자를 길렀던 김종직 문하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 데, 조위는 여러 부류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문학으로 이름이 났고, 결국 문학 으로 입신하여 성종의 지우를 받아 「호당기」를 짓고, 두시언해를 편찬하고 그 서문을 쓰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성종 사후 연산군이 즉위한 뒤 유자광 등이 무오사화를 일으켜서 승승 장구하던 그의 벼슬길이 급전직하하여 귀양길로 이어지는 시기를 당해서는 글 에 대한 그의 생각과 철학이 바뀌었다. 그는 무오사화 이전에는 김종직의 문학에서 다진 도학을 바탕으로 문학으로 발양하였고, 이 시기의 그의 시는 벼슬살이 가운데의 한가함을 노래한 것이 주 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무오사화를 지나면서는 실의에 빠지고 문학에 대한 관심이 도학으로 회귀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그의 시는 귀양살이 속에서의 한가함을 노 래하는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 많다.
본고에서는 주로 조선의 사대부들이 남긴 지리산 한시를 통하여 지라산에 대한 그들의 사상적 인식이 어떻게 드러나 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비록 유학자 내지는 유학척 교양과 식견,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에 젖어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시이가는 하지만, 그들이 지리산과 관련지어 말한 사상의 폭은 외 형적으록 매우 포괄적으로 나타나 보였다. 하지만 이면적인 성격을 살펴보면 이들 의 유가척 안식도 매우 폭이 좁고, 불교나 도교 그리고 민간신앙에 대한 인식은 매우 자신틀의 편의에 맞추어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유가적인 인식은 ‘존현’ 정신으로 특정지을 수 있다. 도가적 인식은 ‘유선’ 사상 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불가적 인식은 ‘향도’ 의식으로 특정지을 수 있다. 민간신 앙적 인식은 ‘불배’ 의지로 특정지을 수 있다. 이들이 지리산을 가는 동안, 그리고 지리산 위에서 보고 겪은 것에 지리산에 대 한 인식이 다양하게 드려나 었는데, 지리산을 다녀온 뒤의 생각에도 또한 유가적인 생각을 바탕으후 한 감회를 피력한 것이 많다. 지리산에 오르거나 다녀오니 현 설의 막힌 것 흑은 물든 것이 터지거나 씻어졌다고 감회를 밝혔다. 한마디로 마치 신선세계에 오른 것 같다고도 하였으나, 이들이 현실로 돌아올 때의 사상적 지향 점은 역시 유가로 선회하고 었음을 볼수있다. 유학적 현실에 담갔던 몸을 빼어 지리산으로 향함에 그것에 대한 인식이 유불도 및 민간신앙에까지 미쳤지만 유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다시 현실로 돌 아옴에 유가적 본연으로 회귀함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신선세계의 하나로 일컬어 지고 하고, 가장 많은 절을 안고 있으며, 그 꼭대기에 민간신앙의 대상이 자리잡고 았는 지리산을 읊은 사대부들의 한시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 그것이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