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최성각의 중편소설 약사여래는 오지 않는다 를 중심으로 불교적 상징이 생태적 위기 속에서 문학적으로 어떻게 변용되고 기능하는지를 분석하 였다. 기존 연구가 주로 환경오염과 타자성 회복을 중심으로 이 작품을 조명해 왔다면, 본 연구는 ‘약사여래’라는 불교적 상징 부재와 지연이 문학적 사유의 공간을 어떻게 열어주는지를 집중적으로 고찰하였다. 작품은 고통과 구원의 문 제를 전통적인 종교 서사로부터 이탈시키며, 불교적 사유를 교리적 재현이 아닌 문학적 질문과 성찰의 장으로 전유한다. 이를 통해 문학은 종교와 생태 윤리를 넘나들며 고통 이후의 삶을 사유하게 만드는 수행적 공간으로 기능한다. 특히 약사여래라는 상징이 단지 구원의 부재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재를 통 해 독자가 스스로 고통의 의미와 존재의 조건을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본 논문은 불교, 생태, 문학이라는 세 사유 영역의 접점에서 문학 이 어떻게 구원의 문제를 재사유 하는지를 탐색하였으며, 이를 통해 불교적 세 계관과 문학적 상상력이 만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의 의가 있다.
본 논문은 완도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의 복장 기록인 중수 원문(1865년)의 해석과 불 상 양식의 비교분석을 통해 불상의 제작 시기가 1628년임을 밝힌 것이다. 중수 원문의 기록 에 의하면, 완도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은 1628년에 조성되었고, 1802년ㆍ1845년ㆍ 1865년에 걸쳐 중수되었으며, 원 봉안처는 해남 대흥사 대광명전이었고, 1845년과 1865 년에 불상의 중수를 주도한 승려는 초의 의순이었음이 확인된다. 초의 의순은 19세기 전라 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화승 원담 내원(1845년)과 용완(원) 기연(1865년)과 함께 신 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을 개금ㆍ중수했다. 특히 초의 의순은 선교(禪敎)와 학예(學藝)에 뛰 어난 자질을 가졌으며 19세기의 대흥사 불사를 이끈 승려이다. 두 화승(내원과 기연)은 초의 의순이 주도한 대흥사 불화 제작에도 참여했다. 완도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이 1628년에 조성된 사실은 중수 원문의 기록과 17세기 전반에 조성된 불상들과의 양식 비교를 통해 파악했다. 초의 의순이 쓴 「대둔사신건광명전상 량문(大芚寺新建光明殿上樑文)」, 「대둔사비로전신건화연소(大芚寺毘盧殿新建化緣疏)」, 「불상개금모연문(佛像改金募緣文)」에 의하면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은 1628년에 조성 된 후 대흥사 대광명전 비로자나삼불상 가운데 좌존으로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흥 사 대광명전은 화재로 소실되어 1841년에 새로 건립되었다.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의 양식 특징은 조각승 태전이 조성한 대흥사 목조약사ㆍ아미타불상(1612년)을 계승했고, 현진이 1610년에서 1630년 사이에 제작한 불상과 친연성이 강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응원ㆍ인균파 및 수연파 불상의 특징도 일부 반영되어 있다. 신흥사 목조약사여래좌상은 17세기 전반에 조성되어 19세기 대흥사 현창 운동 과정에서 새로 건립된 대광명전에 봉안되어 개금ㆍ중수된 불상으로, 교학과 학예면에서 뛰어난 자질을 가진 초의 의순이 불상의 개금ㆍ중수 불사를 주도한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불교사 및 불교미술사를 연구하는데 자료의 가치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