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이디스 워튼의 버너 자매 에 나타난 형이상학적 욕망에 대한 고 찰이다. 워튼은 몇몇 소설작품들에서 주로 여성 인물들이 결혼의 환상을 통해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본 논문에 서 다루는 버너 자매 는 그녀의 첫 소설작품이면서 신흥부자들의 등장이 한창 이던 19세기 후반 뉴욕의 비주류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에블리나의 결혼에 대 한 환상은 가부장적인 남편 래미의 폭력과 약물중독으로 좌절되고, 결국 아이를 잃고 병들어 세상을 떠난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가톨릭으로의 개종은 앤 엘리자 에게 변절로 간주되고 에블리나가 언니 앤 엘리자 품 안에서 죽어가는 이방인 으로 남는다. 에블리나는 자신의 개종은 태어난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난 아이 와 천국에서 재회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녀에 게 있어서 아이는 신에게로 다가갈 수 있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매개역할을 하 면서, 또한 그것은 엘리자에게 충격적이고 그들 사이의 간극이다. 하지만, 자매 에게 공통적인 점은 사랑이다. 이로써, 본 작품에 나타난 다양한 관점의 형이상 학적 관점이 재조명된다.
엘리엇은 1927년 영국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본격적으로 기독교에 귀의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엘리엇이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고 형이상하적 가치를 지향하는 성향은 「프루프록의 연가」이전부터 발견된다. 엘리엇의 화자들은 스스로 확신이 부족하며 행동장애를 가진 인물로 등장하지만 이런 성격은 세속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다른 등장인 물들과 세태에 대한 비판의식과 맞물려있다. 이 논문에서는 엘리엇의 초기시에 이미 그의 형이상적 지향성이 풍부하게 된다는 전제아래 다음과 같은 점을 살펴보았다. 먼저 「프루프록의 연가」의 화자를 비롯한 초기시의 화자들이 모두 인간관계에 실패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관계하는 대상들과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화자들은 세속적인 가치에 몰입하는 다른 등장인물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엘리엇은 죽음의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사후의 문제 대한 자연주의적 견해에 냉소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상실한 상황에 대한 반발로 이해된다. 그가 신화적 방법론을 주창한 것은 시적 제제들을 종교적 위계질서 내에 배치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마지막으로 엘리엇이 그의 시에 무의식을 도입하려 한 시도는 심리학에서 종교적 경험의 근원인 무의식을 탐구하려는 시도와 일맥상통하는 요소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엘리엇의 초기시에는 혁명적인 새로움과 더불어 형이상학적 지향성이 나타난다.
본 연구는 엘리엇의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의 심리적 독백을 푸코의 파레시아 개념으로 접근하여 인류보편적인 도덕적 삶의 양태를 포착하려한다. 진실에 대하여 실천적으로 접근한 푸코의 파레시아는 자 기의식 지도라는 측면에서 자기비판의 개념을 포함한다. 특히 나카야마겐은 기독교 역사에서 파레시아가 가지는 의미로 중간적인 로고스적 인 간상을 추구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즉 기독교가 초월적 사랑을 이상적 으로 추구하지만, 현실적으로 차선의 방안으로 윤리적인 결혼을 제시하곤 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엘리엇의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는 극단적인 두 사랑, 이드와 초자아개념을 형이상학적 기상과 같이 결 합하고, 양자 사이의 윤리적 삶의 양태를 고민하게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엘리엇의 심리적 독백을 사고실험으로 간주하고, 그가 인간의 도 덕적 삶의 한 양태로 극단적 개념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하는 것임을 규명한다.
퇴계 이황과 엘리엇에게는 시간과 공간적 배경에서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 혹은 초월적 사변과 가치에 경도되었 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둘은 모두 현상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 제를 갖고 있는 열등하고 타락한 상태로 인식하며 그 상태로부터 초월적 구원의 방법을 모색한다. 퇴계는 성(性), 즉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우주의 근본원리로서의 리(理)의 존재를 확립하고 리가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노력이 극적으로 표출된 것이 고봉 기대승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이 다. 20세기 초의 엘리엇은 자유주의자 그리고 인본주의자들의 인간 중심 혹은 이성 중심의 경향에 맞서 교회와 그 가치를 굳건히 지킬 것을 주창한다. 엘리엇이 말하는 초자연성(the supernatural) 혹은 신성(the divine)은 퇴계가 우주원리로서 받아들인 리처럼 초월적 혹은 형이상학적 도덕론을 통한 문제해결 모색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엘리엇이 현실계 에 대한 품은 부정적 인식과 형이상학적 해결을 모색해가는 과정은 황 무지 에서 출발하여 재의 수요일 을 거쳐 네 사중주 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성리학과 엘리엇의 초월적 사유가 가진 자위성 과 위계적 세계관이 어떻게 실체적 근거와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 인가는 특별히 현대적 상황에서 유용한 질문으로 보인다.
신학, 과학, 형이상학의 범주들은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 인격적 경험의 요소를 주요 구성 내용으로 삼는 신학은 이러한 요소와 무관한 듯, 물리적 실재에 대한 진술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자연과학과 어떠한 관련성을 갖고 있는가? 본 연구는 이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을 시도하는 작업으로 자연과학의 신학적 형이상학의 토대를 탐구한다.
근대 과학혁명 이후 신학과 과학의 영역은 서로 양립할 수 있는 관계라기보다 상호배타적이며 대립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리하여 종교와 과학은 각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갈등과 반목을 되풀이하며 서로의 주장만을 강조하여 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비판적 실재론자들’로 불리는 이안 바버(Ian G. Barbour), 아더 피코크(Arthur Peacocke),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등은 신학, 자연과학, 형이상학의 통섭을 지향하여 종교와 과학의 불필요한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글은 두 가지 목적을 갖는다. 첫째 근대과학의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기독교적 신념체계 및 가치와 얼마만큼 친화성을 갖는지를 밝히는 것이고, 둘째 신학과 자연과학의 매개체로서 형이상학적 추론들이 얼마만큼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판단해 보는 것이다. 결국 이 글은 ‘기계론적인 세계관’으로 대변되는 근대 과학혁명은 과학의 탐구에서 신학의 형이상학적 요소를 배제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것은 무신론적인 자연주의 혹은 과학적 결정론으로 귀결될 수 없고 오히려 심오한 합리성의 틀 속에서 과학과 신학의 영역을 조화로운 관계로 설정했음을 밝히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