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인 의미를 헌법적인 차원에서 분석하고 이를 계승하는 방법을 도출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2022년 대통 령선거 이후 한국에서는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포함하자는 여론이 형성 되었다. 이에 연구는 첫째,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포함할 가치가 있는지 를 살펴볼 것이다. 둘째, 5.18정신의 헌법전문 수록이 가능하다면, 국가 유공자 예우에 관한 논의를 분석하고자 한다. 연구는 세부적으로 5.18이 한국의 민주화 운동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세계적인 민주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사건이자 민주주의 이행과정의 시민항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이를 계승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국가유공자 예우에 대한 학술적 논 의를 진행하였다. 분석을 통해 연구는 5.18정신의 의미를 4가지로 제시 한바, 첫째, 민주주의 국민저항권, 둘째, 역사적 평가, 셋째, 법·제도 정 비, 넷째, 세계사적 평가 등을 위한 노력 차원에서 분석했다. 그리고 연 구에서는 5.18정신의 헌법전문 수록은 필요하고, 이를 민주주의 국가의 주요한 동력이 되려는 방법으로 5.18 국가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하였다.
이 연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합창을 둘러싼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위기 속에서 세계호남인들이 결속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는 데 있 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산업화 시기에 호남인들은 생활환경이 열악한 고향을 떠나 타지로 향했다. 서울 경기 등 수도권지 역으로의 이동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부산・경남・경북지역 등 국내에서 거듭 이동하게 되었다. 둘째, 세계호남인의 결속은 집단 내부에 공유하고 있는 ‘거시기’로서 통하는 사회적 인지와 암묵적 인지로써 호남인의 정서 와 호남인의 정신이 깔려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셋째, 세계호남향우회 는 동일한 역사적 경험과 문화를 공유한 호남인의 역사적 산물이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탄생시킨 지역공동체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임 을 위한 행진곡’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노래로 정권 교체기 에 갈등이 표출되는 양상을 보여왔는데 이러한 위기의식은 세계호남인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다섯째, 세계호남인향우회의 ‘3무 정책’은 ‘약 한 연대(Weak Ties)’의 효과를 최대화하여 호남인들이 글로벌 연대를 조 직하여 협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세계호남향우회는 지방자치단체의 지원과 회원의 자발적 장학금 모금을 통한 차세대 지역 인재 양성으로 지속이 가능한 모국방문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 으로 생각된다.
이 연구의 목적은 5・18 당시의 상황을 복기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요인, 기독교와 민주화운동의 관계, 5・18 광주민주화운동 전후 대학생의 역할 등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고찰하는 데 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 관한 기존연구들은 사회학적 측면, 정치학적 관점, 역사학적 관 점, 혹은 구술채록이나 증언 등 스토리텔링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본 연구는 당시 생산된 사료를 통해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대학생의 역할에 관해 주목하였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운동의 요인적 측면에서 1979년 10월 26일 이후 군부 내 ‘12·12 군사쿠데타’가 전국대 학생들의 시위를 촉발시킨 것으로 보인다. 둘째, ‘5·17 비상조치’를 통한 비상계엄령 확대, 정치활동 금지, 민주인사의 체포 및 투옥, 대학 휴교령 이 5·18의 발단을 제공한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5·18 광주민주화운동 과 대학생들의 역할은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시민항쟁의 직접 지원 활동 과 적극적인 참여, 광주민주항쟁의 진상 전달 및 국제적 확산 노력 등이 었다. 넷째, 대학생들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결의문 낭독, 반정부집회와 시위, 삐라살포와 전 세계인을 향해 광주의 진상을 확산하기 위해 노력 했다. 향후 연구에서는 대학교수들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사 회적 참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1979년 10월에 발발한 부마항쟁의 환경적 요인을 분석하고 부마항쟁과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과의 연관성을 살펴보고 한국의 시민의식을 분석해 내는데 있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6일-20일 간 단기적으로 발생한 시민항쟁이다. 부마항쟁은 당시 박정희 유신체제가 오일쇼크로 국내 물가상승 경제불안이 지속되는 가운데 YH사건관련 당시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의원직에서 제명한 사건과 연관된다. 유신체제 독재정권의 횡포가 계속되자 부산대 학생들은 반정부 학내시위를 시작하였고 이후 경남 마산지역의 대학가로 확산되었다. 정부당국은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 선포와 경남지역에 위수령을 내려 시위를 강경진압하였다. 부마항쟁이 소강상태로 전환되는 도중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여 부마항쟁은 조기에 막을 내리고 박정희 유신체제 종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역사적 시민항쟁으로 남게 되었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은 부마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것으로 해석되며, 이는 무도한 신군부 세력에 맞서 싸운 한국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시민들이 부마항쟁으 로 시작된 독재권력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이라는 점에서 시기적으로 유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내용면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신군부 세력에 대한 시민들의 항쟁과 시민군 결성, 민주화운동 기간, 희생자 수, 진압이후 진상규명 과정에 대해서는 또다른 관점이 존재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과 민족주의, 6.25전쟁, 반공교육과 민주화운동, 민주시민교육 등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안고 있다. 부마항쟁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계승돼 한국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의를 갖고 있다.